걷는 매력
Ⅰ. 걷는 매력
10월 초다.
비가 내린다. 태풍이 온다고 한다. 제주에는 벌써 태풍 피해가 많다고 한다.
다행히 서울은 걸을 만하다. 운동화를 신고 우산을 들고 집 가까이 있는 덕수궁을 걸었다. 항상 세 바퀴 걷는다. 한 바퀴 걷는데 약 30분 정도 걸린다. 한 바퀴 돌면 등에 땀이 좀 나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데 두 바퀴쯤 걷다가 옛 중앙일보 건물을 지날 때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살짝 올라왔다. 돌아갈까 하는 갈등이 잠시 든다. 마음을 다시 다잡고 무심히 계속 발을 옮긴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컨디션이 살아나고 신기하게 긍정적 힘이 솟는다.
이 마음의 변화가 무엇일까?
걷고 싶은 느낌과 걷기 싫은 기분, 이 마음도 내 마음이고 저 마음도 내 마음인데 말이다. 문득 이 마음과 또 다른 마음은 무엇인가? 두 마음의 심리적 차이가 궁금해졌다. 두 바퀴쯤에 걷기 싫은 감정을 지나쳐 계속 걸어가도록 하는 에너지는 무엇일까? 마음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생각해 보지만 잘 모르겠다. 생각이 많아진다.
밤이 늦었다. 아파트 앞집 전등들이 하나씩 꺼진다. 거실에서 스트레칭을 20분 정도 했다. 누어서 하는 허리 운동, 무릎 끓고 하는 운동, 마무리로 실내 자전거 타기를 20분 탔다. 땀이 조금 나고 기분이 좋아졌다. 자기 전 잠시 금강경을 보았다.
법륜 스님이 쓰신 ‘금강경강의’이다. 해석이 우리 일상 이야기로 연결되어 있다. 쉽게 잘 읽힌다. 매일 조금씩 읽는다. 금강경 제이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 수보리, 법을 청하다 에서 수보리는 부처님에게 마음을 어떻게 항복시키는지 묻는다. 수보리는 부처님 10대 제자 중 한 분이다. 이미 모든 법의 이치를 깨달으시고 덕이 높다. 그럼에도 마음에 관해 끊임없이 의문이 올라오면 부처님에게 묻는다.
이 구절을 읽다가, 산책하면서 궁금해하던 것과 일치된다는 생각이 미치자 순간 소름이 돋았다.
아! 이게 칼 융이 경험했다는 동시성의 원리이구나.
내가 생각한 것이 눈앞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마음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궁금해하는 문제라고 느껴졌다.
더불어 자신감이 생겼다.
쓸데없는 생각이 아닌 것을 마치 증명한 것 같았다. 수보리 같은 분도 마음에 대해 궁금해 묻는데, ‘이런 생각한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야’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삶에서 괴로움과 행복은 모두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달려 있다는 대 명제에 대해 더욱 알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 부처님의 대답이 궁금해졌다.
수보리 질문에 부처님 대답이 궁금해졌다.
호기심까지 생겼다.
혼자서 걷는 매력 중 하나는 바로 이런 궁금증이 나도 모르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물론 다 해결되고 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걷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이다. 아마 궁금해하지 않고 혼자 걷는 시간을 갖지 않고 질문하지 않았다면 지금 벌써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금강경을 마주하면서 수보리의 질문과 연결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발걸음마다 움직임이 소중해지고 더 깊게 관찰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 또한 책을 보는 마음가짐도 신기하게 달라지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재미가 느껴졌다.
그동안 금강경과 도덕경을 법륜스님과 도울 김용옥 책을 주로 보았다. 김기태 선생님 유튜브도 자주 보았다. 금강경은 주로 새벽에 한 두 장씩 꾸준히 보고 있다. 보고 나면 하루 삶의 방향을 정해 주는 기분이 들어 오래전부터 반복해서 보았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 인지 잘 몰랐다. 그래도 조금씩 보아 왔다. 가끔 마음에 드는 글귀를 만나면 감정을 조절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일상에서 혼란스러운 감정 때문에 힘들어할 때마다 책을 놓지 않고 본다.
특히 금강경에 나오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基心)은 ‘마음에 머무르지 말라’고 하는 대목은 직장 생활하고 특히 관리자 역할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원만하게 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지나고 보니 어려움은 내 마음이 머무르는 곳에서 괴로움은 시작되었다.
흐르는 대로 놓아두면 다 지나가는 일이었다. 대부분 원인은 내가 ‘옳다’라는 생각이 상대방을 공격하고 있었다. 원인을 또 한 번 깊이 들어가 보면 내 욕심인 경우가 비일비재해 부끄럽고 미안하다.
금강경 내용 중 수보리의 질문인 마음을 어떻게 항복받는지에 대한 어느 선사의 깨달음 과정을 예를 들어 설명해 놓은 대목이 있다. 어느 스님이 깨달음을 얻어 스승으로부터 법복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그러자 다른 스님들이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법복을 주었다고 시기와 질투를 했다.
심지어 그 법복을 빼앗으려고 무섭게 달려들었다.
법복을 받은 스님은 놀라 도망을 간다.
도망가다가 잡힐 듯 하자 법복을 바위 위에 던져 버린다.
쫓아오던 스님 중에 한 사람이 법복을 잡는다.
옷을 잡는 순간,
아! 옷이 과연 무엇인가. 옷이 깨달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때 법복을 빼앗으려고 뛰어갔던 마음과 법복을 잡으면서 멈춘 마음 차이는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그 이치를 아는 것이 깨달음을 얻는 것이라고 설명을 한다. 이 설명을 듣고 한 참을 생각 했다. 알 듯 모를듯하다. 어딘가 모르게 알맹이가 빠져 버린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반복해 생각에 생각을 더해 보지만 머리만 복잡하다.
# 새로운 자아가 출현한 것 같았다.
몇 주가 지났다. ‘두 마음’과 ‘마음 항복’에 초점을 두자 걸을 때마다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질문으로 바뀌기도 한다.
또 어떤 발걸음을 통해 어디선가 문득문득 생각지 못한 답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 생각에 집중하느라 지나가는 사람 사이에서 한참을 멍하게 있을 때도 있었다.
그 생각이 그동안의 해결책과는 다르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뻥 뚫리는 느낌과 뭔가 모를 호기심과 재미가 생긴다. 그동안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보통은 생각이 올라오면 불쾌한 적이 많았는데 이것은 달랐다.
새로운 자아가 출현한 것 같았다.
마치 큰 보물을 얻은 듯한 희열이 느껴졌다.
마음의 항복에 대해서도 나름 내 생각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법복을 차지하려고 달려들었던 스님은 순간 자기 행동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멈출 수가 없다.
보통 욕심을 부릴 때 자기 행동을 알아차리는 것이 쉽지가 않다.
대부분 자기의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발버둥을 칠뿐이다.
그래야 하는 것이 당연하고, 반드시 이겨야 생존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그렇게 뭔가를 채우며 사는 것이라고 배워왔다. 하지만 스님은 자신의 행동이 자신이 추구하는 깨달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즉 욕심임을 알아챈 것이다.
그래 이 차이였다. ‘욕심 속에 있느냐, 욕심을 내는 것을 아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문득 머릿속에 ‘욕심을 내느냐, 욕심 내는 것을 아느냐’가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 이거다.
무슨 말씀을 듣는 기분이었다.
엄청난 희열이 느껴졌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임에도 한쪽으로 치우쳐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살면서 마주하는 일마다 불안하고 괴로웠던 원인도 한쪽으로 치우쳐 살았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욕심을 내는 것을 아는 순간 동시에 욕심을 내는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보는 일이 쉽지가 않다.
우리가 항상 뭔가 하려고 하는 것이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욕심을 내는 것은 욕심이라는 생각이 가득 차 다른 것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생각 때문에 진실을 보지 못한다.
이름이 법복이지. 그 옷이 무슨 깨달음인가 말이다. 옷을 깨달음으로 알고 잡으려고 하는 마음을 알아채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 허상임을 깨우치는 것이다. 생각이 허상임을 자각하면서 욕심에 따라 요동치던 마음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차분해진다. 기적 같다. 알아채자 그렇게 무섭게 뛰던 마음이 안정이 된 것이다 ‘마음을 항복받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늦은 밤길 눈앞에 보인 줄을 보고 뱀인 줄 알고 놀랜다.
하지만 가까이서 막상 줄인 줄 알면 두려움은 순식간 사라진다.
이 말도 도움이 되어 마음을 항복받는 사실을 확실하게 이해가 되었다.
사실을 정확하게 알면 두려운 마음이 사라졌듯이 마찬가지로 욕심이 욕심인 사실을 인지하자 순식간에 사라 진 것이다.
마음은 이렇게 실체가 없다. 언제나 왔다가 사라지는 작용일 뿐이다.
더 나아가 내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마치 바람처럼 왔다가 가는 것이다.
나는 덕수궁 길을 걷다가 걷기 싫은 마음과 걷고 싶은 두 마음을 보게 된다. 걷기 싫은 마음이 올라오고, 그 마음이 알아지자 걷기 싫은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순간 걷는 것만 있었다. 걷기 싫다는 생각으로부터 힘쓰지 않고 벗어나게 되었다. 걷기 싫다는 생각이 알아지자 그 생각에 따라가지 않고 순간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그 이치가 작용을 한 것이다. 운이 좋다. 여기서 나도 모르게 움직이던 그 마음에 대해 관심을 갖자 이치가 더 깊게 이해되었다. 그동안 습관으로 극복했던 것과는 다른 이해가 있었다
이렇게 생각에 대해서 생각을 볼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를 객관화해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올라오는 생각들을 조용히 보기 시작했다. 생각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올라오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믿을게 못되었다. 그저 과거와 연결되어 무엇이든 보거나 듣거나 하면 뜬금없이 올라왔다. 그저 내 안에 감각들과 작용하여 불쑥불쑥 올라오는 것이다. 나는 그 생각과 더불어 감정이 나인 줄 알고 살아왔다. 오래된 가난한 감정과 생각들이다. 오랜 시간 쌓인 생각 벽은 두꺼워 그 집속에 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때문에 올라오는 생각을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아주 짧은 순간순간 알아지는 것이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니 알아채기 시작했다. 아주 가끔이지만 그 생각은 아무 조건 없이 그냥 사라졌다. 아주 흔적도 없이 말이다. 그렇게 큰일이 난 것처럼 복잡했던 생각이 바람이 볼에 스치고 사라지듯 없어졌다. 내가 그 생각에 보태지만 않으면 되었다.
그래 이것이 바로 항복을 받는 것이구나.
나는 그 이치를 알아가면서 더욱 시간을 내어 조용한 시간을 갖고 자주 걸었다. 더불어 복잡했던 마음의 자리에는 괴로움이 덜 한 상태로 있는 시간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삶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하다.
그렇다. 마음을 항복받는 지혜는 자신의 생각을 알아채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하루에 3분 정도 시간을 내어 시도를 해 본다.
아침 점심 저녁 세 번 3분 정도 잠시 올라오는 생각을 알아챈다.
본인이 직접 체험해야 한다.
그저 올라오는 생각들을 알아지는 경험을 해 본다.
판단하지 말고 그냥 알아지는 경험을 꾸준히 해 본다.
그러면 어느 날 그 이치에 대한 의식이 마치 아침에 해가 뜨듯이 올라온다.
깨어나는 것이다. 깨달음 즉 지혜가 생기는 것이다.
그 지혜가 마음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는 작용을 하게 된다.
이것이 마음을 항복받는 것이다.
이 이치를 터득하게 되면 일상에서 당신을 끌어내리는 일들로부터 중심에서 머물 수 있게 되며, 더 나아가 괴로운 일들이 오히려 당신을 일깨워 주며 큰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지킬 수 있는 긍정적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질문
오늘 했던 생각 중 기억나는 것을 세 가지 쓴다. 그중 가장 오랫동안 머무른 생각은 무엇인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살면서 도움 받은 사람이 있다면 누구인가? 세 사람을 써 본다. 그리고 도움 준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