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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필 Apr 14. 2024

고통도 쉬어 간다


 암 3기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경기도 한 도시의 입시학원 원장이었다. 떨어지면 어떡하려고 그러느냐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뒤로 하고 정든 친구들, 선생님들과 헤어져 이사까지 감행하고 서울의 한 중학교로 전학한 지 고작 한 달 남짓 된, 외고 입시 면접을 6주 앞둔 딸의 엄마이기도 했다.  

        

 항암 치료는 보통 3주 간격으로 한다. 나는 항상 1박 2일로 건국대 병원에 입원을 해서 치료를 받았는데 입원 수속을 밟기 전에 병원 바로 앞 롯데백화점 꼭대기 층 식당가에서 최후의 만찬을 먹곤 했다. 그 후로 최소 일주일 이상은 정상적으로 밥을 먹기가 힘들 테니까.         


  백화점 식당가라고 하지만 식당의 종류와 개수가 많지 않았고 먹고 싶은 것보다는 먹어야 할 것을 골라야 했다. ‘해초섬‘이라는 식당은 각종 해초와 생선구이, 미역국, 갈치속젓 등 바다 내음이 물씬 나는 음식을 전문적으로 하는 곳이었다. 나는 강릉이 고향이지만 바다 음식을 잘 먹지 못하고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 해초와 미역의 미끄덩거리는 질감을 싫어하고 아무리 잘 요리한 생선에서도 비린내를 맡으며 젓갈은 언감생심 먹어볼 엄두도 내어 보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그 식당 창가 자리에 앉아서 고개를 옆으로만 돌리면 내가 곧 입원할 병실이 수평으로 나란히 건너다 보였다. 지금은 백화점에서 병원을 조망하지만 조금 있으면 병실에 누워서 백화점을 바라보겠구나 하는 처연한 생각을 하며 비릿한 음식들을 천천히 천천히 씹어 삼키곤 했다.     

      

 오후 1시쯤이면 호텔처럼 예약된 병실의 세팅이 끝나 입실할 수 있었다. 하루 네 시간 자며 열심히 일했던 탓에 암에 걸렸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나마 보람이라면 1인실에 누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아는 분의 부탁을 거절 못 해 들었던 두 개의 보험이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여 받게 된 암 진단금 덕이 더 컸지만 말이다. 입원에 필요한 물품은 병실에 이미 구비돼 있었다. 코트와 블라우스, 스커트, 구두를 벗어 옷장 속에 정리하고 아무리 작은 것을 입어도 내게는 큰 환자복으로 갈아입으면 힙합 바지에 비니 모자를 쓴 환자 패션이 완성됐다. 다음은 로비로 나가 키와 몸무게를 재어야 한다. 몸무게는 늘어도, 줄어도 좋지 않고 원래 체중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리고 손목에 마치 놀이공원에 가면 채워 주는 것 같은 동그란 방수 재질로 된 띠를 찬다. 12층 병동에서 나갔다 들어온다거나 각종 문을 통과하려면 이 띠에 있는 바코드를 대어야 하고 병원 내에서의 소소한 각종 계산도 이 띠를 갖다 대면 경쾌한 삑 소리와 함께 척척 해결되는 만능 바코드 띠다. 손목의 바코드가 읽힐 때마다 나 자신이 마트의 물건이 되어 계산대 위를 지나가는 것 같긴 했지만 편리했다.  

       

  입원을 하고 곧 혼자가 되면 늘 잠이 부족했던 나는 일단 잠을 잤다. 곧 다가올 비극도 쏟아지는 잠을 막을 수 없을 만큼 만성 수면 부족이었던 나는 임신했을 때도 단 한 번밖에 못 잤던 낮잠을 3주에 한 번은 늘어지게 잘 수 있었다. 항암제를 바로 꽂아 주면 자는 동안 다 맞을 수 있으련만 아쉽게도 첫 번째 항암제는 잠에서 깨고 난 5시나 되어야 배달되었다.            

         

 이 타이밍이 고역인 것은 항암제를 투여하는 데 서너 시간은 걸려서 저녁 식사를 하면서도 쉼 없이 몸속으로 항암제를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병원 식사를 한식, 양식 중 선택할 수 있었고 양식을 선택하면 브런치처럼 우아한 접시가 들어온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6차까지 항암 치료를 하면서 매번 손도 안 댄 채로 식판을 반납했는데 긴 링거줄을 타고 줄줄 흘러드는 항암제에 밥을 말아먹는 듯한 환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환상이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이유는 바로 케모포트 때문이었다.     

   

  케모포트는 인공혈관 장치로 첫 항암 치료를 하기 며칠 전 미리 병원에 가서 부분 마취를 한 후 쇄골 근처를 찢고 심었다. 주삿바늘을 꽂는 바늘꽂이를 몸속에 집어넣는 것이다. '심었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 호미로 밭의 흙을 파내고 씨앗을 심고 흙을 다시 덮듯 칼로 살을 째고 케모포트를 심고 다시 살을 덮으니까 말이다. 다만 보드라운 흙에 씨를 심는 과정과 달리 보드라운 살에 케모포트를 심는 과정은 상당히 과격했다.     

 

 수술실 침대에 반듯하게 누운 나의 몸 위로 침대 아래까지 떨어지는 초록색 천막 같은 것을 씌운다. 비가 갑자기 내릴 때 난전에서 장사하는 분들이 몇 가지 안 되는 물건 위에 서둘러 비닐을 푹 덮어 씌우는 것과 흡사하다. 안경을 벗었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소리까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케모포트가 자리 잡을 쇄골 근처의 천만 둥그렇게 가위로 오려내는 것 같았다. 한껏 겁에 질린 내 눈앞에는 초록색 천만 가득하다. 눈을 깜빡이면 길지도 않은 속눈썹이 서걱거리는 초록색 천에 닿는다. 그러고 나서 마취 주사를 놓고 내 살을 칼로 죽 긋는데 정육점의 대형 도마 위에 올려진 고깃덩어리가 된 기분이었다. 그다음 무시무시한 압력으로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쇄골 부위를 힘껏 누르는 것 아닌가! 내 몸이 철제 침대를 뚫고 아래로 처박힐까 봐 겁이 날 정도의 압력이었다.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그 누르는 기세에 저절로 신음이 튀어나왔다.   

        

  그 케모포트가 여섯 번의 항암 치료와 한 번의 수술, 수십 번의 검사를 하는 동안 온갖 주삿바늘이 꽂히는 바늘꽂이가 되어 주는 것이다. 간호사 분들이 쇄골 근처의 볼썽사납게 툭 튀어나온 부위를 만지작만지작한 뒤 케모포트를 향해 어림짐작으로 주삿바늘을 찌르는데 실력 혹은 운에 따라 한 번에 정확히 꽂기도 하고 양해의 말과 함께 두 번 세 번 찌르기도 한다. 바퀴 달린 옷걸이 같은 링거 걸이에서부터 쇄골까지 링거 줄이 늘어지니까 강아지 목줄 같아 영 폼은 나지 않지만 일단 두 손이 자유로우니 용변을 보고 손을 씻거나 세수를 하는 것이 편해 혼자 입원해 있어도 불편함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케모포트를 더욱 애지중지하게 된 사연은 따로 있다. 4차 항암 치료부터는 케모포트가 자꾸 막혀서 애를 먹었는데 간호사 분이 케모포트를 교체해야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 아닌가! 다시 초록색 천에 덮이는 것은 상상만 해도 부검대 위에 놓이는 것처럼 끔찍했던 터라 믿지도 않는 하느님께 올리는 뻔뻔한 기도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어쨌든 항암제는 쇄골로 들어가는 셈이다. 숟가락을 떠서 들다 보면 숟가락이 쇄골 근처를 지나게 되고 마른밥을 뜬 숟가락을 국에 담가 적시듯 밥알이 항암제에 촉촉하게 적셔지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어서 항암 주사를 맞으면서는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이 애물단지 케모포트는 많은 시간이 흘러서 뽑을 때까지 거의 매 순간 의식되어 나를 괴롭혔다.          


 한 번 입원하면 항암제를 세 병 맞은 것 같은데 우선 그 양이 생각보다 많았고 시간도 서너 시간이나 걸렸다. 하지만 맥주 들어가는 배가 따로 있다고 술꾼들이 말하듯 그 많은 항암제도 모래밭에 물이 쑥쑥 스며들듯 아무 무리 없이 내 몸 어딘가로 슬그머니 흡수되었다. 그중 하나는 약 색깔도 뻘개서 맞고 나면 바로 소변 색이 주황색 섞인 갈색으로 변하는 참으로 탐탁지 않은 항암제였는데 뻘건 색깔로 턱 밑부터 늘어진 링거 줄을 쳐다보고 있자면 딸을 가졌을 때도 하지 않았던 입덧이 욱욱 올라오곤 했다. 유한락스를 목구멍으로 들이붓는 기분이랄까.     


 사실 내 느낌이 정확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항암제란 기본적으로 모든 세포를 죽이는 소독약 같은 것이니까. 온몸에 소독약을 쫙 뿌리면 암세포도 죽고 멀쩡한 세포도 죽는다. 논개와 일본군 장수처럼 같이 얽혀 죽는다. 멀쩡한 세포까지 죽는 통에 머리카락도 빠지고 발톱도 빠지고 열 손가락의 지문이 다 벗겨진다. 그 후 3주를 쉬는 동안 정상 세포는 서서히 살아난다. 물론 한 번 죽은 암세포까지 부활하면 안 된다. 3주 후 정상 세포가 좀 회복되어 살 만하면 다시 소독약을 뿌린다. 그러면 다시 한번 암세포도 죽고 정상 세포도 죽고, 이런 과정을 여섯 번 반복하는 것이 항암 치료였다. 호사가들이 쉬운 암, 심지어 착한 암이라고 떠드는 암들도 직접 겪어 보면 결코 그런 암은 없다. 남의 염병이 내 고뿔보다 못하다는 속담도 있는데 하물며 암이야 말해 뭣하겠는가.           


 그런데 항암 치료의 반전은 '쉼 있는 고통'이라는 것이다.          


 수술 전에 항암 치료부터 하기로 한 나는 2019년 11월 28일 목요일을 첫 항암 치료일로 정했다. 외고 면접은 약 한 달 뒤인 12월 23일 월요일이었기 때문에 2차 항암 치료는 3주 간격이라는 원칙을 조금 깨고 4주 뒤인 12월 26일 목요일에 받기로 했다. 예외 없는 원칙은 없으니까. 나는 11월 28일 목요일에 입원해서 온몸에 항암제를 살포한 뒤 29일 금요일에 퇴원했다. 그리고 월요일에 출근을 했다. 학원에도 인생이 걸린 결전의 시간을 앞둔 학생들이 가득했다.       


  일주일간은 속이 메슥거리고 미열 감도 났으며 두통이 심했다. 변비도 심해졌고 피부가 가렵기도 했다. 한 번은 어지러워서 꽈당 넘어지는 바람에 부원장을 식겁하게 만들었지만 수업만 중단했을 뿐 출근을 해서 상담도 하면서 선생님들과 학생들에게 내가 암 환자인 것을 숨겼다.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알면 동요가 생길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암 치료의 고통보다 앞섰다. 아픈 것을 숨기느라 옷이며 구두를 평상시처럼 입고 신어야 했는데 정장을 입고 하이힐을 신은 암 환자라니 지금 생각하면 좀 우습다. 

          

 그리고 항암 치료 후 일주일이 지난 뒤부터 좀 살만해지자 다음 항암치료 전까지의 3주간은 딸을 비롯해 특목고 입시 준비를 하던 학생들의 자기소개서를 마무리 짓고 면접 준비를 마치 아프지 않은 사람처럼 맹렬히 치러냈다. 처음 일주일 동안은 머리카락이 빠지지 않았다. 아주 드물게 기적적으로 존재한다는 머리카락이 빠지지 않는 암 환자가 되는 것 아닌가? 로또에 당첨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불가능한 기대를 했다. 그런 기대를 한 나를 혼내듯 머리카락은 한 번 빠지기 시작하니까 혹독한 다이어트 중 입이 터지듯 무섭게 가속도가 붙었다. 처음 모자를 쓴 지 불과 이틀 만에 뭉텅뭉텅 빠져버리는 머리카락을 밀어버리고 면접일 직전에는 정장을 입고 뾰족구두를 신고 그리고 그런 차림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모자를 쓰고 수십 명의 학생과 학부모 앞에서 특목고 입시에 대한 입시설명회를 마쳤다. 그리고 2차 항암 치료 하루 전인 크리스마스 날에는 면접을 마친 딸과 함께 명동까지 진출하기도 했는데 바로 '쉼 있는 고통' 덕분이었다.    

      

  그 이후로도 매번 항암 치료를 하고 나서 시간이 흐르면 컨디션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고 다음 항암 치료를 하기 직전 일주일 정도는 정말로 꽤 양호한 상태가 되었다. 이 기간에는 외식도 할 수 있고 원한다면 누군가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몸 상태가 회복되었는데 정작 마음 상태가 문제였다. 이제 며칠 후면 다시 항암 치료를 받는다는, 마치 지옥으로 소환된다는 신의 고지를 받은 듯한, 또는 연쇄 살인의 다음 타깃이 된 듯한 두려움에 시달리기 마련인데 그래도 쉼 있는 고통에 감사하며 고통 없는 시간들을 알뜰하게 누리려고 애를 썼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암에 걸리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다만 어떤 사람들은 암에 걸리기 전에 죽을 뿐이라고 한다.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다만 나는 내 경험을 통해 암에 걸리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어쩔 수 없이 암에 걸려 고통의 터널을 지나가야 한다면, 그래도 '쉼 있는 고통'이니까 그 '쉼' 속에서 고통을 이겨낼 힘을 키우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지 않을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조언하고 싶다.     

 

 치료는 완료되었지만 끈질기게 이어지는 약 때문에 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불면의 밤이 계속되고 있다. 매일 밤 어둠 속에서 재발의 공포와 불안이 덩치를 키우고 그렇게 아플 때까지 내 몸을 돌보지 않았던 회한이 켜켜이 이불 위로 내려앉는다. 암과 싸웠던 고통도 좀처럼 잊히지 않지만 망망대해에서 만난 섬처럼 반가웠던 '쉼'도 나는 아직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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