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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필 Apr 12. 2024

서울이 특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딸이 일곱 살이 되어 유치원에 다니게 되었는데 학부모들에게 보여줄 것이 필요해선지 아니면 진실로 국어 교육의 초석을 다져 주기 위해서인지 꼬맹이들을 단체로 한자급수시험에 응시하도록 했다. 첫 시험은 삼십 자인가 오십 자인가를 외워서 봤고 당연히 모두들 합격했다. 합격을 안 할 수 없는 시험이니까 유치원에서 보게 한 것일 게다. 그것이 수십 개의 산맥을 넘고 강을 건너고 성을 가로지르는 고난의 대장정의 시작이었다.

    

 시작을 했으니 끝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살지 않아서 나는 서울에서 낙오되었으니까 딸은 그렇게 살게 하지 않으리라 항상 다짐하던 때였다. 장단음 구별 같은 것은 깨끗이 포기한다 해도 국문과를 졸업한 내가 봐도 희한한 모양의 한자가 가득했고 한글 뜻도 찾아 봐야 하는 한자가 줄을 이었다. 게다가 공인 급수 단계부터는 한자로 된 글을 읽고 해석하는 것, 한시의 형식과 표현기법 등도 시험에 출제되었다.     


 딸은 잠깐 방심하여 4급에서 한 번 떨어졌을 뿐 그다음부터는 엑셀만 밟고 질주해 초등학교 2학년 5월, 2급 시험에 전격 합격했다. 그 기간 동안 딸은 하기 싫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고슴도치 엄마가 아닌 학원장의 관점에서 냉정히 평가하자면 딸은 공부를 안 하지는 않으나 힘들 만큼 열심히 하지도 않는, 딱 대한민국의 보편적인 학생이었다. 힘이 들려고 하면 얌전히 앉아 손을 놀리면서도 의식의 흐름은 샛길로 돌려버렸다. 몹시 어린 나이에 그 일을 티 나지 않게 할 줄 알았다. 집중력이 약했고 자발적 태도도 없었다. 딸의 그런 성향이 공부를 많이 시키는 엄마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자신의 타고난 깜냥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원인이 뭐가 중요하랴. 해결책이 중요하지. 너에겐 엄마가 있다.     


 언젠가 다시 서울로 진입했을 때 서울 아이들, 엄밀히 말하면 대치동 아이들에게 밀려서는 안 될 일이었다. 공부를 하겠다고 진심으로 마음을 먹는 때가 너무 늦게 오거나 안 올 수도 있다. 게다가 소도시의 학원을 운영하면서 수없이 보았지 않았는가. 지금부터 열심히 해봤자 지금까지 열심히 한 아이들을 넘어서는 일은 대부분 불가능하다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내가 흙 구덩이에서 구르자. 밭을 갈고 씨를 뿌린 후 물을 주고 잡초도 뽑으면서 수확을 해야 하지만 그것을 다 할 수 없다면 딸은 수확이라도 하게 하자. 나는 듣도 보도 못한 한자들을 딸의 머릿속에 집어넣기 위해, 그리고 일상의 모든 단어를 한자로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내 생명을 십 년쯤 단축시켰을 거라 짐작될 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폭포수처럼 쏟아부었다. 그리고 그 노하우는 십 년도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늙지 않는 여배우처럼 내게 고스란히 간직돼 있다.     


 3급 시험을 보러 갔을 때 딸은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나와 손을 잡고 시험실로 들어서는 딸을 향해 감독관이 말했다.

꼬마야, 엄마 시험 끝날 때까지 너는 나가 있어야 해.

의자에 앉으면 발이 땅에 닿지도 않는 딸을 앉혀 두고 돌아 나왔는데  다음에 준 2급 시험을 보러 갔더니 그 감독관이 또 있었다.

아니, 3급 시험에 붙었단 말이에요?


 2급 시험까지 합격한 기쁨도 잠시, 한 달 뒤에 전국한자경시대회가 있었다. 동아일보사가 후원하고 성균관대학교에서 시험을 본 후 나중에 동아일보에 수상자 사진과 기사도 실렸던 것으로 보아 참가비나 받아먹는 대회가 아니라 나름 뼈대 있는 대회라고 생각했다. 그 한 달 동안 다시 딸과 나는 피나는 노력을 했다. 이때도 피는 내가 더 흘렸을지 모른다. 초등학교 1, 2학년 부라 기본 한자 개수는 2급 시험에 비하면 별 거 아니었지만 부수 몇 백 자와 사자소학, 명심보감 같은 책 등 슬쩍 추가된 범위가 배보다 큰 배꼽처럼 붙어 있었다.     


 시험을 보러 간 날, 나는 바로 기가 죽었다.  딸은 내 손을 잡고 아장아장 시험 장소를 향해 걸어 올라갔는데 다른 선수들은 다들 버스를 대절해서 단체로 전국에서 모여들고 있었다. 학원 소속으로 전문적인 시스템 속에서 1년 코스로 준비를 한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그 선수들 속에서도 2급까지 합격한 선수는 딸이 유일했다는 것. 전라도 광주에서 한문 학원을 운영한다는 할머니 원장님은 내게 경이로움을 표하며 딸을 가르친 노하우를 돈을 줄 테니 넘기라고까지 하셨다.     


 시험을 보고 언덕길을 내려오는데 내 손을 꼭 잡은 딸이 내 귀를 끌어당겨 귓속말을 했다.

엄마, 나 부수 쓰는 거 '오이 과'랑 '손톱 조'를 바꿔 썼어.

시상식에서 보니 딸은 그 할머니 한문학원 원장님 손자보다 높은 등위였다. 그 두 글자를 헷갈리지 않았으면 혹시 1등을 했을까 싶었지만 나는 모세의 기적을 보고 있는 사람들 이상으로 충분히 감격했고 구단 소속 프로 선수들 속에서 엄마 소속 아마추어 선수가 이뤄 낸 빛나는 결과라 자부했다.      


 나는 열아홉 살 이후 수학 공부와 시원하게 절교한,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그런 내가 꼬박 2년 간 하루 5시간씩 수학의 정석을 펼치고 숫자를 읽었다.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것이 불법비디오물이라면 그것만큼 무서운 것 중 하나가 공부에 대한 집착이 아닐까.

  

 문과 성향이 심하게 뚜렷한 딸의 향후 입시는 결국은 수학이 결정지을 터였다. 전문가로서 평가하건대 국어, 영어는 수능 정도의 시험에서는 문제 될 것이 없을 만큼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5학년 초 수학 선행 학습을 시작하고부터 탄탄대로였던 딸의 공부는 연일 돌부리에 걸려 휘청거렸다. 수학적 감각이 없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하게 밝혀졌다. 심지어 공부 재능까지도 평범한데 국어, 영어는 엄마표 학습이 워낙 교묘하고 끈질겼던 덕에 우수한 결과를 얻었던 건지도 모른다는 의심까지 생겨났다.   

   

 나는 중학교 수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숙제를 하던 딸이 모르는 것을 물으면 알려 줬다. 한 번 막히면 줄줄이 멈출 수밖에 없는 것이 수학이라 그랬다. 그렇게 중학교 3학년 수학까지 같이 하고 나서 나는 내 임무가 끝일 줄 알았다. 국문과를 졸업한 지 20년 정도나 지난 엄마가 고등학교 수학을 가르친다는 건, 아무리 고등학교 때 영어보다 수학을 좋아하고 잘했던 문과생이었다 해도, 된장찌개도 제대로 못 끓이는 내가 요리대회에 나가겠다고 출사표를 던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냐는 말이다.     


 고등수학 선행 학습이 시작되자 돈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울에서 경기도까지 선생님을 부르고 서울 수준의 과외비에다가 교통비 할증까지 얹어서 돈을 퍼부었지만 고등수학 (상)에서 도돌이표였다. 1년 간 기본서를 몇 번이고 돌았는데 딸의 머릿속은 유한락스로 막 청소한 화장실처럼 깔끔했다. 나는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었다.      


 나는 새벽 1시에 자고 5시에 일어났다. 5시부터 7시까지 수학의 정석을 공부하고 딸을 깨워 학교에 보내고 나서 일찌감치 학원에 출근을 한 후 누군가가 출근할 때까지 원장실에서 3시간을 더 수학의 정석을 읽었다. 정석을 택한 것은 우선 고전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학에서 고전이 갖는 힘과 위상에 대해 강력한 믿음이 있던 나는 수학도 그러하리라고 유추했다. 그다음 이유는 내 관점에서 보았을 때 정석은 다른 수학 문제집들과 달리 짧게 요약 정리하기보다는 설명이 많은 스타일의 책이어서 마치 소설이나 수필을 읽는 것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정석을 푼다기보다는 정석을 읽고, 또 읽고, 또 읽어서 이해했다.     


 그런데 분명 처음에는 억지로, 하기 싫은 것을 참으며 했는데 시간이 흐르자 기묘한 현상이 나타났다. 우선 딸의 열렬한 지지를 얻게 된 것이다. 중학생 딸이 매일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 두 시간씩 엄마와 수학 공부를 한다는 것은 결혼 10년 차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딸은 수학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엄마를 통해 위로를 얻는 듯했다. 토익 점수는 딸보다 낮은 수학 과외 선생님들이 수학을 가르치면서 하나 같이 '어렵지 않아, 이걸 왜 몰라'라고 말했으니까. 다음으로는 오랫동안 글만 읽었던 내게도 숫자로 딱딱 떨어지는 수학 공부가 오래 묵은 변비가 해결되는 순간처럼 상쾌함을 종종 주었다. 어느 때부터는 새벽 5시에 일어나 믹스 커피를 한 잔 타서 수학의 정석을 딱 펴는 그 순간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카뮈의 '이방인'을 펼치는 때보다 설레기조차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결핵에 걸려 입원했던 기간을 제외하면 매일 다섯 시간 공부에 두 시간 수업까지 하루 7시간을 수학에 할애했고 암 진단을 받은 날에도 예외는 없었다. 그 대장정이 끝난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는데 그 이유는 그다음 날이 내가 처음으로 항암 치료를 받은 날이기 때문이다.    

 

 주변에서는 내가 이 년 간의 수학 공부 때문에 충분히 자는 것도, 먹는 것도 못 해서 그렇지 않아도 위태롭던 건강을 해쳤다고들 했다. 맞는 말일 것이다. 그래도 그 시간들 덕분에 딸이 수학에 대해 자신감을 얻었고, 그래서 서울로 이사하여 대원외고에 지원할 결심을 했고, 그래서 대원외고 입시설명회 날 학원을 하루 쉰 덕분에 병원에 가 암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래서 지금까지 알콩달콩한 모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공부를 통해 딸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이해하고 친밀감을 쌓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공부로밖에 대화할 줄 몰랐던 미숙한 엄마를 딸은 용케 미워하지 않았다. 딸은 엄마의 헌신을 고마워했고 나는 헌신을 거부하지 않는 딸이 고마웠다.  딸의 여유가 비극으로 치닫기에 충분한 이야기의 결말을 바꿔 주었다.

   

 올해 2월에 안동에 다녀왔다. 딸의 대학 입학을 기념하기에는 다소 조촐한 여행이었으나 여행지는 항상 외갓집이 있는 강릉이었던 터라 우리에게는 충분히 새로웠다. 밤이 되자 한옥을 개조한 그윽하고 고즈넉한 숙소에는 옆마을 본가에서 자고 온다면서 주인까지 떠나 버려 고양이들과 우리 둘뿐이었다. 새벽까지 두런거리다 자려고 눈을 감았다. 스무 해 동안의 대장정이 이제 끝나는구나. 이제는 쇠약해진 엄마 대신 여행 가방을 번쩍번쩍 들고 폰맹이며 길치인 엄마 대신 길을 척척 찾을 만큼 자란 딸이 옆에서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강릉에서 자라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지방으 로 밀려났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온 나에게는 지금도 서울이 특별시다. 서울은 고집이고 투쟁이고 노력의 장소다. 딸에게는 서울이 특별하지 않다. 그냥 사는 동네다.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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