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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Dec 02. 2022

30평대 아파트가 꿈이 될 뻔했다


"깜짝이야. 엄마 거기서 뭐 해?"


상견례를 한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내방 창가에 엄마가 서 있었다. 엄마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결혼 꼭 해야겠니? 너 남의 집 살아본 적 없잖아. 이혼한 시누이가 나와서 월세를 얻어주겠다는 말이 너무 기가 막힌다. 엄마는 너 이 결혼 안 했으면 좋겠다."


"어... 생각해 볼게."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날 상견례 자리에 시어머니 대신 형님이 나왔었다. 시부모님은 남편이 군대 갔을 때 이혼했다. 형님도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었다. 내가 아버님께 인사 갔을 때 들은 얘기는, 일산신도시에 지금 세입자가 살고 있는 30평대 아파트가 있는데 우리가 결혼하면 주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상견례 자리에 나온 형님은 당장 세입자를 내보내기 어려우니 월세를 얻어주겠다고 말했다. 형님이 돈을 다 끌어다 썼기 때문에 세입자에게 내줄 돈이 없었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나이를 서른두 살이나 먹었어도 철이 없던 나는 월세와 자가의 차이점을 알지 못했다. 어떻게 시작했느냐가 얼마나 큰 차이로 이어질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형님 소유의 오피스텔에서 살다가 1년 반 뒤에 아파트 세입자가 나가면 그때 들어가 사는 것으로 엄마의 결혼 승낙을 받았다. 2005년 11월 26일, 밥이 그렇게 맛있다고 소문난 신촌의 웨딩홀에서 우리는 결혼식을 했다.


결혼한 지 한 달쯤 지났을 때였다. 이혼한 시부모님 양쪽에서 돈을 끌어다 사업을 하던 형님이 부도를 내고 일본으로 도망쳤다. 형님이 떠난 후 어머니가 살던 집이 경매에 넘어간다는 서류가 날아왔고 빚쟁이들이 찾아왔다. 돈을 탈탈 털어 빚을 갚았다. 아버님이 우리한테 주겠다던 아파트를 팔았다.  가지 다행인 건 이혼했던 시부모님이 다시 합쳤다.


우리는 서울 은평구 오래된 주택에 전세를 살았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웠다. 그 돈으로 남양주에 가면 애들 키우기도 좋고 넓은 아파트에 살 수 있어 이사를 갔다. 남편이 출근하기 힘들어했고 쓸데없이 집이 너무 넓어 관리비가 많이 나왔다. 다시 은평구로 와 대출을 받아 20평 신축빌라를 샀다. 3,6호선 지하철역이 가까이 있고 초등학교, 도서관이 3분 내 거리에 있다. 사는데 불편함이 없고 만족했다. 그러다 아이가 셋이 되고 짐이 늘면서 집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지역 주택조합 아파트를 계약했다. 2019년 말에 입주 가능하다더니 아직 땅도 못 파고 있다. 누가 지역 주택조합 아파트를 계약한다고 하면 도시락 싸들고 말리러 다니고 싶은 심정이다. 그 와중에 서울 아파트 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무리를 해서라도 아파트를 샀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일본으로 도망갔던 형님이 돌아왔다. 사과 한마디 없다. 시부모님도 밉고, 형님도 밉고, 남편도 꼴 보기 싫었다. 친정에서 가지고 있던 약간의 땅에 신도시가 들어설 때 보상금을 받았는데 그 돈으로 남동생에게 아파트와 차를 사주고 언니와 내게는 500만 원을 줬던 엄마도 미웠다.


서울에 30평대 아파트 하나만 있으면 더 바랄 것 없이 행복할 것 같았다.  좁은 집에서 늙어 죽을 때까지 살게 될까 두려웠다. 작년까지는 그랬다. 막내딸이 내게 '엄마는 꿈이 뭐야?'라고 물어주기 전까지는.


딸의 질문을 받고 생각했다.  꿈이 서울에 30평대 아파트를 갖는 걸까? 그건 아니잖아. 진짜 꿈을 꿔. 집이 좁은 게 아냐. 짐이 많은 거야. 그리고 나는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로 했다.

미니멀 라이프는 필요한 것 이외에는 가지지 않는 생활방식이다. 적게 가짐으로써 여유를 가지고 삶의 중요한 부분에 집중하는 것에 의의를 둔다. 물건을 적게 가지는 것뿐 아니라 ‘단순하고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생활 속에서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는 사람을 ‘미니멀리스트(Minimalist)’라 한다. (다음 백과 검색)


지금은 내가 가진 것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서울에 30평대 아파트를 갖고 싶다는 욕심만 버리면 나는 더없이 행복한 삶이다. 예쁘고 건강한 아이가 셋이고 몇 년 뒤에 그깟 아파트가 아니라 빌딩을 하나 사주겠다는 든든한 남편이 있다.



오늘은(11월 26일 토요일) 우리 부부가 결혼한 지 17년째 되는 날이다. 남편이 삼 일 전에 코로나 진단을 받았다. 온 가족 다 걸렸을 때 그렇게 몸을 사리더니 결국 걸리고 말았다. 꼬소해.


대부분의 결혼기념일에 남편과 둘이 식사를 하거나 가까운 곳에 여행을 다녀왔다. 오늘은 혼자 뭐 하고 놀까 하다가 결혼기념일 기념으로 달리기나 하자 싶어 오후에 불광천을 갔다. 불광천을 수놓은 예쁜 불빛들을 보며 신나게 10km를 달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 보니 언젠가 남편 혹은 나 둘 중 누군가는 홀로 결혼기념일을 맞이해야만 하는 날이 오겠구나 싶어 잠시 슬퍼졌다.



밤에 혼자 와인을 한잔 마시며 며칠 전 남편과의 대화가 생각나 웃음이 났다.


남편이 물었다.


"나는 다시 태어나면 자기랑 한 스무 살쯤 일찍 결혼할래. 자기는?"


"어... 힘들게 다시 태어나서 왜 굳이 또...?"


"대답 잘해라~!!"


"나도 자기랑 결혼하지 당근. 그런데 나는 다음 생에 남자로 태어날 예정인데... 자기가 여자? 괜찮겠어?"


"안돼. 싫어~~"


남편이 여자로 태어나서 나 대신 애 셋을 낳는 건 상상만 해도 꼬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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