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택배 상자를 받았다. 안에는 예쁜 꽃 풍선과 함께 돌돌 말린 현금 30만 원이 들어있었다. 보낸 사람은 남편의 누나다. 달갑지 않았다. 회사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기야, 형님이 꽃에 현금을 넣어서 보냈네. 나는 형님 생일도 모르는데 나도 앞으로 챙겨야 해?"
"누나가 뭘 바라고 보냈겠어? 누나 생일은 내가 챙길 테니까 자기는 잘 받았다고 전화나 한번 해."
누나 얘기만 나오면 그렇게 성질을 내던 남편이 많이 달라졌다. 우리가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형님이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내고 일본으로 도망쳤다. 시어머니가 살던 집이 경매로 넘어간다는 등 여기저기서 난리도 아니었다. 형님의 빚을 부모님과 우리가 갚았다.
몇 년 뒤 형님이 돌아왔을 때, 바로 형님을 용서한 부모님과 달리 남편은 형님과 말도 섞지 않았다. 한동안 형님은 남편 눈치만 보고 있었다.
전에 남편이 어릴 적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부모님이 지방으로 일하러 가시면 며칠씩 누나랑 둘이 있었는데 초등학생인 누나가 밥을 해줬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취업해서 부모님은 안 사주는 비싼 청바지와 운동화도 사주고, 남편 친구들까지 불러서 패밀리 레스토랑도 데려갔다고 한다. 그런 좋은 기억들 때문에 남편은 누나를 오래 미워하지 못할 것이다.
내게는 형님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다. 형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도 전에 사고 치고 도망가 버렸고, 돌아와서는 시누이 노릇을 하려 했다. 아무것도 안 주고, 안 받고 싶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내게 보낸 생일 선물...
한참 동안 꽃 풍선을 앞에 두고 앉아있었다.
풍선에 '생일 축하해. 이 언니가 항상 고마워한다.'라고 적혀 있다. 고마워하는데 나한테 그랬냐? '이 언니가 항상 고마워한다'라는 말투도 맘에 안 든다. 내가 원래 이렇게 꼬인 사람은 아닌데... 어쨌거나 형님은 남편에겐 소중한 누나다. 이 선물은 남편 생각해서 보냈을 것이고, 나 또한 남편 생각해서 기쁘게 받아야겠지.
몇 번 심호흡을 하고 전화를 걸었다.
"형님! 제 생일 안 챙겨도 되니까 돈 좀 아껴 쓰세요. 노후대비 하셔야죠. 그리고 명절에 늦잠 좀 그만 주무시고요. 설거지도 좀 같이 하고 그러자고요. 저도 힘들어요!"
라는 마음의 소리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대신 내 입에서 나온 말은,
"형님~꽃 잘 받았어요. 너무 예뻐요~현금도 정말 감사해용~호호호"
하나씩 돌돌 말린 돈을 펴며 생각했다.
나 혹시...
남편을 추앙하는 건가?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구 씨가 미정에게 했던 말을 패러디해 본다.
<구 씨가 미정에게 했던 대사>
너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면 깜짝 놀란다. 나 진짜 무서운 놈이거든. 옆구리에 칼이 들어와도 꿈쩍 안 해. 근데 넌 날 쫄게 해. 네가 눈앞에 보이면 긴장해. 그래서 병신 같아서 짜증 나. 짜증 나는데 자꾸 기다려. 알아라 좀. 염미정, 너 자신을 알라고.
남편아, 너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면 깜짝 놀란다. 나 진짜 무거운 편이거든. 형님 때문에 집 한 채 날려도 꿈쩍 못 했어. 근데 넌 날 30만 원 받고 웃게 해. 돈이 눈앞에 보이면 행복해. 그래서 병신 같아서 짜증 나. 짜증 나는데 자꾸 웃어. 알아라 좀. 남편, 내가 이러고 산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