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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Dec 11. 2022

태어날 때부터 계획이 다 있었구나!

49년 만의 깨달음


인생 첫 번째 좌절은 내 키가 155cm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은행 성적 상위 30% 키 158cm 용모단정'

1993년 내가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고졸 여자의 금융원 취업 첫 번째 조건은 키 158cm 이상이었다. 155cm라도 되면 취업지도실에 가서 158cm라고 우겨라도 볼 텐데 150cm가 겨우 넘는 키로 158cm라고 우길 수는 없었다. 앉아서 일할 은행 직원이 왜 그렇게 키가 중요했던 것일까? 결국 나는 은행이나 증권회사에는 면접 한번 못 가봤고 열심히 공부한 주산, 부기, 타자 하나도 쓸모없는 의류회사에 취업했다.


내 인생 두 번째 좌절은 내 키가 160cm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 패션 163cm 이상 55 사이즈 피팅 가능자'

의류회사에서 3년을 일하고 전문대 의상학과에 입학하면서 패션 디자이너라는 꿈을 갖게 됐다. 허구한 날 밤새고 장학금 받아가면서 열심히 공부했는데... 젠장, 이번에는 5cm 더 커졌다. 거기다 날씬하기까지 해야 된단다.


이대로 키의 장벽에서 포기할 것인가? 이번에는 정말 간절히 하고 싶었다. 피팅 가능한 몸이 아니어도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 거야. 열심히 두드리고 다녔고 결국 문이 열렸다. 결혼하고 첫째를 낳기 전까지 난 꽤 유능한 숙녀복 디자이너였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나는 1974년 어느 병원에서 태어난 아이 중 가장 작았다고 한다. 항상 작았던 나는 키 작은 것 말고는 친구들보다 못하는 게 없었다. 못하는 게 있으면 노력하면 다 됐다. 다 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알게 된 외모의 경쟁력... 키가 작다는 것은 나를 계속 소심하게 만들었다. 언제나 높은 굽의 구두를 신었고, 사람들과 함께 걷거나 서 있는 것이 불편했다.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내가 바라는 건 딱 하나였다.

-키는 엄마 닮지 마라. 키만 크면 된다.

그 딱 하나가 내 맘대로 안됐다.


아이들 친구 엄마 중에 많이 통통한 엄마가 있었는데 아이가 살찔 것을 염려해 많이 먹지 못하게 했다. 내가 말했다.

-잘 먹어야 키가 크지. 살은 나중에 빼면 되잖아.

-언니, 살 빼는 거 그렇게 쉽지 않아요. 내가 뭔들 안 해봤겠어요?

그 엄마는 살찐 것 때문에 억울한 일이 많았던 것 같았다.


몇 년 전에 잠깐 벨리댄스를 배운 적이 있다. 강사가 모델처럼 키가 크고 날씬했다. 내가 다시 태어나면 갖고 싶은 그런 몸이었다. 우연히 길에서 그녀를 만났다. 장난스럽게 내 어깨를 감싸며 그녀가 말했다.

-나는 다시 태어나면 이렇게 아담하게 태어나고 싶어요.

-네? 정말요?

-남자 만나기가 쉽지 않아요.

그녀는 큰 키 때문에 속상한 일이 있었나 보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은행에 취업 못한 건 정말 다행이었다. 난 계산기로도 덧셈 뺄셈을 잘 못하, 숫자에 굉장히 약한 사람이다. 그리고 은행에 취업을 못 했기 때문에 패션 디자이너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 키가 155cm가 넘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내가 좌절해야 할 건 작은 키가 아니라 작은 마음이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난 매우 건강한 편인데 쓸데없는 체력 소모가 없는 작은 몸이라서 그런가 보다. 지금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와 달리기를 하는 데는 큰 키 보다는 건강이 필요하다. 내가 지금껏 살아온 삶에서 지금 보다 더 큰 키가 필요했던 순간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아~~ 난 태어날 때부터 계획이 다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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