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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Jul 31. 2022

그 일은 나를 위해서 일어났다


"윤 팀장, 사장님이 다음 주부터 나오지 말래."


패션 디자이너로 일하던 2004년 가을, 근무 중에 시장조사를 나간 압구정동 갤러리아 백화점 커피숖에서 실장이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다. 나의 근무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던 사장이 나를 해고하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 회사는 사장이 나를 마음들어 해 입사한 회사였다. 믿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 출근해서 사장실에 찾아갔다. 아침 회의 시간에 하품을 해댄다는 게 가장 마음에 안 들었고, 실장한테 나의 불성실함에 대한 보고를 여러 차례 들었다고 했다. 계속 하품을 한 것도 사실이고, 지각을 자주 한 것도 사실이라 별말 못하고 사장실을 나왔다.


이 회사 입사 직후에 마포에서 일산로 이사를 하게 됐다. 잠실 쪽이었던 회사까지 2시간 넘는 출근시간이 적응이 안 돼 늘 피곤했고, 회의시간이면 하품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입사하기 전부터 원하는 팀장이 따로 있었던 실장은 사장한테 내가 자주 지각하는 등 불성실하다고 보고하고, 본인의 측근을 이미 나의 후임자로 정해 놓은 상태였다. 내가 안 나간다고 버티자 실장은 매우 당황했다.


너무 억울했던 나는 자다가 이불 킥을 해댔고, 밥이 안 넘어가 숟가락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주변에 나를 위로해 줄 친구는 많았지만 현실적인 조언을 해줄 친구는 없었다. 얼마 전까지 있었지만 호주로 유학을 가고 없었다. 유학 간 친구에게 메일을 보냈더니 전화가 왔다.


"회사를 상대로 싸워봤자 너만 다칠 거야. 그냥 지들끼리 잘해보라고 하고 웃으면서 나와. 그리고 호주로 놀러 와라."


인생 최악의 사건이었다. 이렇게 불명예스러운 퇴사라니, 억울했지만 친구의 말대로 웃으며 회사를 나왔다.


곧바로 호주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호주에서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어학원을 다니며 새벽에는 맥도널드 청소를 하는 그 친구를 만나 한 달간 여행을 하기로 했다. 마침 어학원이 방학이라고 했다.


친구는 시드니와 멜버른 여행 계획을 야무지게 준비해 놓았다. 지금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멜버른에서 버스를 타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243km의 바닷길, 그레이트 오션 로드를 여행한 것이다. 휴식시간에 기사님이 모닥불에 물을 끓여 이름 모를 차를 타 주었는데 처음 맛보는 그 차 맛이 너무 좋았던 기억도 난다. 거의 한 달간 시드니와 멜버른 곳곳을 돌아다녔고, 피곤하면 그냥 해변에 눌러앉아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한국에서의 억울함 따위 전혀 생각나지 않을 만큼 행복한 시간이었다.




"모든 일은 나를 위해서 일어난다."

얼마 전 출근길 지하철에서 정신과 의사 '닥터 지하고' 강연을 보던 중 이 말이 나왔을 때 2004년 가을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인생 최악의 사건이라고 억울해했던 해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인생 최고의 여행도 없었을 것이. 결국 그 일은 나를 위해서 일어난 일이었다는 것을 이십여 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오랜만에 앨범을 꺼내 그때 호주 여행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았다. 사진 속의 나는 너무나 해맑게 아무런 근심 없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사진에는 나오지 않는, 사진을 찍고 있던 친구를 보며 웃었던 것이겠지. 내 인생 최고의 여행을 함께 한 그 친구는 호주로 유학을 떠날 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는데, 지금 여기서 아이 셋을 낳고 나와 함께 살고 있다.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기억 안나는 그 회사 사장님께 나를 해고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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