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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Jun 06. 2023

여행 전날 얄미운 손님이 찾아왔다

베트남 다낭 3박 4일 여행기 #1


  달력을 보며 그분을 기다린다. 오늘 오려나, 내일 오려나... 이렇게 애타게 손님을 기다리긴 참 오래간만이다. 손님이 원래 와야 할 날짜는 1일이다. 6월 6일에 나는 막내딸과 베트남으로 여행을 간다. 딸은 호텔 수영장에서 나와 함께 놀 거라며 기대에 부풀어 있다.


  내가 기다리는 손님은 결국 여행 가기 전날인 6월 5일에 찾아왔다. 그분은 최근 몇 개월간 변함없이 1일에 날 찾아왔고 원래대로라면 우리가 베트남에 가는 날에돌아갔어다. 한두 번 당하는 것도 아닌데 배신감에 치가 떨린다. ! 꼭 여행 갈 때, 출장 갈 때, 명절에, 체육활동을 하는 날에 맞춰 그렇게 제멋대로 찾아오고야 마는 건가! 아, 얄미운 생리씨~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처음 생리를 시작했다. 그날은 내가 활동하던 단체에서 캠프를 가기 전날이었다. 생리대를 속옷에 어떻게 붙이는지도 몰랐던 나는 언니한테 대충 교육을 받고 캠프에 갔다. 강당 한쪽에 모두의 가방을 내려두고 바깥활동을 했다. 극소심좌였던 나는 생리대를 가지러 간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오랜 시간 생리대를 갈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생리혈이 새어 나와 옷에 묻었다.

"너 뒤에 뭐 묻었어."

내 뒤에 서 있던 아이가 말했다. 너무 부끄러워서 2박 3일 캠프가 하나도 재미없었다. 평생 처음으로 간 캠프에서 기억나는 건 생리가 샜다, 딱 그거 하나였다.


  생리가 부끄러운 건 줄 알았다. 슈퍼에 가서 생리대를 사면 검정 봉지에 담아줬다. 남들 눈에 안 보이게 숨겨서 가지고 다녀야 했고 생리대를 착용한 티가 날까 봐 긴 상의를 입거나 허리춤에 점퍼를 동여매 엉덩이를 가리고 다녔다.


  생리할 때가 다가오면 매콤 달콤한 음식이 당기고 평소보다 많이 먹었다. 피부에 트러블이 생기고 몸이 붓고 우울감이 들었다. 생리가 시작되면 허리와 아랫배가 아프고 짜증이 났다. 열다섯 살부터 오십 살까지, 한 달에 5일이라고 치면 일 년에 60일, 임신수유기간 빼고 30년이라고 치면 평생 1800일을 생리로 힘들게 보냈다는 결론이 나온다. 뭔가 억울한 느낌인 이렇게 여행 가기 전날 생리가 시작되면 억울함은 따따블이 된다.




  둘째 딸은 중학생이 되자 생리대를 챙겨가지고 다녔다. 요즘에는 생리를 숨기지 않고 축하받을 일로 여기며 딸의 친구들은 초6에서 중학교 진학할 때 시작했다. 아이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나도 (최대한 늦게 하길 바라면서도) 2학기가 넘어가자 왜 안 하는지 은근 걱정이 됐다. 딸은 중1 가을에 생리를 시작했고 온 가족이 모여 케이크를 놓고 축하해 줬다. 딸에게 줄 생리 용품을 챙기며 보니 요즘에는 다양하고 좋은 제품들이 많다. 라때처럼 생리가 샐까 봐 밤낮으로 조마조마할 일은 없을 듯해 다행이지만 가끔 생리통으로 힘들어하고 진통제를 달라고 할 때 안쓰럽다.


  나는 최근 생리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는데 폐경이 가까워지면 그렇다고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생리가 사라진다면 홀가분하기만 할까. 조금 당황스럽고 허탈한 마음도 들 것 같다. 비록 여행 가기 전날 찾아온 얄미운 손님이지만 잊지 않고 찾아와 줘서 고맙다고 반겨주는 게 맞을 것 같다. 폐경이 되면 그동안 생리하느라 1800일 고생한 나를 위한 파티를 열어달라고 가족들한테 요청해야겠다. 내가 생리를 잘해서 삼 남매가 태어난 거라고 큰소리치면서!




  "자기야, 떡볶이 먹을래?"

밤 열 시에 여행가방을 싸다가 매콤한 떡볶이가 생각나 남편에게 물었다.

"그래."

"좀 매콤하게, 어묵 많이 넣고. 내 스타일 알지?"

"자기가 해 준다는 거 아니었어?"

"나 지금 생리 터져서 허리 아프고 기분 완전 우울해. 자기가 해 주는 게 느~므 먹고 싶어."

생리는 가끔 벼슬이 되기도 한다.


남편표 분모자 떡볶이


  남편이 만들어 준 떡볶이를 맛있게 먹고 여행가방에 탐폰과 진통제, 초콜릿과 사탕을 쌌다. 남편과 첫째, 둘째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막내딸과의 여행을 기대하며 설레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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