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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Nov 30. 2023

결혼기념일에 술 먹고 뻗은 남편에게 화내지 않는 비결


우리는 2005년 11월 26일에 결혼했다. 지금까지 모두 열여덟 번의 결혼기념일을 보냈다. 그 모든 기념일에 특별한 이벤트가 없었지만 이번에는 더욱 강렬하게 아무것도 없었다.


결혼기념일 전날은 토요일이었음에도 남편은 나가야 한다고 했다. 얼마 전에 베트남 출장을 다녀왔는데, 거기서 만났던 분들이 오셨다는 거다. 그분들과 지방 어느 발전소를 돌아봐야 한다고 나갔고,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며 전화가 왔다.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알아?"

"알지. 오늘 만난 분들 중 한 분은 오늘이 결혼기념일이고, 한 분은 내일이래."

남편은 함께 있는 분들 중에 우리와 비슷한 날 혹은 같은 날 결혼한 분들이 있다며 신이 나서 말했다.

"이혼당할 남자들의 모임인 거야?"

"하하. 미안미안."

전화기 너머로 누군가 '죄송합니다'라고 외친다. 다들 술기운에 즐거운 듯하다.

"나 오늘 못 들어갈지도 몰라. 베트남 분들 여기서 자고 내일 바로 공항으로 가실 거야."

"그래, 거기서 그냥 자고 와라."


남편은 자신이 술을 마셔도 멀쩡하다고 믿고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모두 잠든 고요한 집안에 불을 다 켜고, 같이 라면을 먹자고 하거나 할 말 있다는 거짓말로 나를 깨운다. 자는 척하면 안 자는 거 다 안다면서 볼을 꼬집는다. 나를 깨워놓고 자기는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코를 곤다. 내 입장에서는 술 먹고 새벽에 들어와서 피곤하게 하는 것보다 안 들어오는 게 편하다. 그렇게 남편은 결혼기념일 전날 외박을 했다.


결혼기념일 당일 정오쯤, 남편이 집에 거의 도착했다며 전화가 왔다. 나는 일요일마다 봉사활동을 하는 노랑꿈터에 있었다.

"자기야, 빨리 와. 보고 싶어."

"곧 끝나. 금방 갈게."


봉사활동을 마치고 서둘러 집으로 들어갔다.

"자기야~"

그의 대답은...

"드르렁드르렁 푸우.... 컥..."

아이들은 모두 나가고 없었다. 고요한 집안에는 남편의 코 고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드르렁드르렁...


"자기야, 밥 먹어."

대충 밥을 차려놓고 남편을 깨웠다.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별로 안 먹었어."

"뻥 치시네. 적당히 먹어라."

밥을 다 먹고 설거지를 마치고 나니 그 소리가 또 들린다. 드르렁드르렁...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쯤, 이제 저 인간을 깨워서 저녁을 먹으러 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막내딸이 말했다.

"엄마, 찜질방 가자."

"지금?"

"응. 엄마가 저번에 간다고 약속했잖아."

그랬나?

"자기야, 찜질방 갈래? 좀 일어나 봐."


남편을 깨워 찜질방을 갔다.

"우리, 결혼 20주년에는 뭐 할까?"

남편이 물었다.

"지금까지 별거 없었는데 20주년이라고 뭐 하겠어? 난 결혼 10주년에는 모든 사람들이 유럽여행 정도는 다녀오는 줄 알았어."

결혼기념일에 대한 환상이 아직도 남아있다면, 지금 찜질방 원적외선 매트에 누워 꼼짝 안 하는 남편을 가만 놔두기 힘들었을 것이다.


결혼기념일에 먹은 찜질방 계란과 식혜, 맛있었다^^


우리의 열여덟 번째 결혼기념일은 그렇게 지나갔지만 서운한 마음은 없다. 난 그저 20주년, 30주년 남편이 건강하게 함께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다.


마지막으로 비밀을 하나 공개하자면, 이벤트 못하는 남편과 살다 보니 결혼기념일 선물은 내가 직접 챙긴다. 물론, 내 거만. 택배가 언제 오려나.


초3 막내딸이 결혼기념일 선물로 그려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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