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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Dec 29. 2023

진섭이 형은 요즘 뭐 하시나?


"진섭이 형은 요즘 뭐 하시나?"

남편이 침대에 엎드려 게임을 하면서 노래를 틀었는데, 변진섭의 '새들처럼'이 나왔다.


"변진섭 콘서트 갈래?"

나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놀러 갈 기회를 잡았다. 검색을 해보니 진섭이 형은 현재 전국투어 콘서트 중인데 서울, 경기 쪽은 이미 끝났고 원주, 부산, 제주 콘서트가 남아 있었다.


"우리 집에서 원주까지 얼마나 걸리지?"

"안 막히면 한 시간 반 정도."

"갈래? 12월 23일 토요일이야."

"그래."

12월 초에 별생각 없이 원주치악체육관에서 하는 변진섭 콘서트 티켓 2장을 예매했다.


콘서트 일주일 전, 남편이 콘서트가 끝나고 운전하기 힘들 것 같다며 공연장 근처에서 1박을 하고 오자고 했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12월 23일은 크리스마스 연휴가 시작되는 날이라는 걸.


"크리스마스인데 애들끼리 있으라고 할 수 없잖아. 그냥 집에 오자."

"자기가 운전할 거 아니잖아. 난 자고 올래. 호텔도 벌써 예약했어."

평소에 이런 사람이 아닌데, 부지런히 호텔을 알아보고 예약까지 해뒀다고 한다. 커다란 욕조가 있고, 안마 의자도 있고, 생긴 지 얼마 안 돼 깨끗한 호텔이라면서 나를 유혹했다.

"지금 취소하면 위약금 내야 돼. 애들끼리 있으라고 하면 더 좋아할 거야."


남편이 예약한 원주 센트럴 호텔 vip룸


지금껏 애들만 놔두고 외박을 한 적이 없다. 첫째가 고2, 둘째가 중3이니 그 둘은 괜찮을 것 같다. 남편말대로 더 좋아할 거다. 막내는 따라간다고 하면 데리고 가면 된다.

"지윤아, 아빠가 굉장히 좋은 호텔을 예약했다는데, 같이 갈래? 너 호캉스 좋아하잖아?"

"음... 가고 싶긴 한데 난 24일에 친구랑 약속도 있고, 그냥 집에 있을래."

"엄마 없어도 잘 수 있어?"

"응. 나 엄마 침대에서 자도 되지?"

"그럼."


콘서트 당일 낮 열두 시에 집을 나섰다.

"첫째야, 학원 끝나고 바로 들어와. 동생들 잘 챙기고."

"둘째야, 막내랑 싸우지 말고. 일찍 재워."

"걱정 마. 저녁때 뿌링클 꼭 시켜줘야 돼."

"난 베이컨 포테이토 피자."

아이들이 고맙게도 내 밥이 아닌 배달음식으로 저녁을 먹기를 원했다.


서울에서 원주까지 세 시간 정도 걸려 도착했다.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아 놀러 가는 차량이 많았다. 호텔 체크인을 하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식당 이름이 '예테보리'라서 보리밥집인 줄 알았는데, 스웨덴 음식을 파는 곳이었다. 간단하게 비빔밥이나 한 그릇 먹으려고 했는데, 거하게 스테이크를 먹었다.



변진섭은 1980년대 후반 대한민국 최초의 공식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레전드 가수다. 새들처럼, 홀로 된다는 것, 너무 늦었잖아요, 네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 숙녀에게, 희망사항 등 1,2집에 실린 대부분의 곡들이 대히트를 기록했다.


당시 중학생이던 나는 길거리 싸구려 테이프를 사서 늘어지도록 돌려가며 듣고, 가사를 노트에 적어 외웠다. 지난번 이문세, 이승철 공연을 볼 때처럼 변진섭의 노래 역시 모르는 게 거의 없었다. 그 노래를 즐겨 듣던 때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1990년 어느 날, 변진섭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 내가 좋아하는 가수 이상은이 나온다고 해서 파스텔로 그림을 그린 엽서를 보냈다. 변진섭을 둘리로 그리고, 이상은을 전봇대로 그렸다. 변진섭과 이상은이 정말 예쁘고 재밌는 엽서가 왔다며 내 엽서를 소개했다. 너무 부끄러워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어쩔 줄 몰라했던 일이, 바로 어제 일처럼 기억이 났다.


1966년생이면 벌써 57세이신데, 가창력은 여전했다


다섯 시에 시작된 공연이 일곱 시가 조금 넘어 끝났다. 낮에 먹은 스테이크가 아직 소화되지 않은 것 같아 간단하게 회에 소주나 한잔 하자고 횟집엘 갔다. 그런데 그곳은 예상과 달리 요리가 코스로 나오는 고급 식당이었다.


"딴 데 갈까?"

"그냥 먹자. 젤 비싼 거 먹어."

"우리 돈 너무 많이 쓰는 거 아냐?"

"괜찮아. 이러려고 돈 버는 거지."

남편이 이렇게 말해줄 때 쫌 멋져 보인다.

"그래. 우리 1년 열심히 살았으니까 이 정도는 즐겨도 되겠지."



남편이 진섭이 형을 궁금해한 덕분에 계획에 없던 사치를 부렸다. 그나저나 다음 달 카드값은 어떻게 메꾸지... 남편이 연말 보너스를 받아 온다면 쫌 많이 멋져 보일 텐데. 



*올해 마지막 글이 될 것 같습니다. 2023년을 시작하기 전에 버킷리스트를 만들었는데 거의 이루지 못했어요. 하지만 인생의 즐거움은 뭔가를 이뤄냈을 때보다는 이뤄가는 과정 속에 있다는 걸 깨닫는 한 해였습니다. 제 글을 읽어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2024년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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