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아람 May 08. 2024

세상에서 피자가 제일 싫다는 딸의 남사친

며칠 전이 막내딸의 열 번째 생일이었다. 아이 생일에 간단하게 미역국 라면을 먹었다. 생일에 미역국이 아닌 미역국 라면을 끓인 건 내가 귀찮아서가 절대 아니다. "지윤아, 아빠는 생일에 미역국 말고 미역국 라면 끓여달라고 했었는데?"라고 말했을 뿐인데, "미역국 라면 맛있잖아. 나도 미역국 라면 먹을래."라고 아이가 원한 거다. 난 아이가 원하는 걸 최대한 존중하는 엄마이므로, "아, 그럴래? 미역국 라면이 맛있긴 해." 라며 흔쾌히 미역국 라면을 끓였다.


너무 편하게 딸의 생일을 보냈나 싶어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든 나는 딸의 머리를 빗겨주며 말했다.

"오늘 학교 끝나고 친구들 데리고 올래? 엄마가 간식 준비해 놓을게."

"학교 끝나고 학원 안 가는 친구 있으면 오라고 할게."


사실 나는 딱 한 명의 친구를 만나 보고 싶었다. 그 아이는 딸이 요즘 날마다 어울려 노는 같은 반 남자친구 진이다. 딸은 진이네 강아지를 산책시켜 준다며 날마다 공원을 간다. 딸이 가끔 누가 누구랑 사귀고 누가 누구한테 고백했다는 얘기를 하길래, 그 아이랑 사귀는 거냐고 물으니 그냥 '남사친'이란다.


학교는 5교시 수업이고 1시 30분에 끝난다. 아이들이 온다면 2시 전일 것이고, 점심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니 배가 고프지는 않을 것이다. 뭘 준비할까 고민하다가 내가 아는 모든 아이들이 좋아하했던 베이컨 포테이토 피자를 준비했다.


내가 아는 모든 아이들이 좋아했던 베이컨 포테이토 피자


피자와 음료, 과자, 젤리를 준비해 두고 아이가 오기를 기다렸다. 딸아이가 진이 포함 남자아이 두 명, 여자 아이 한 명과 함께 집으로 들어왔다. 집안을 둘러보던 진이가 식탁 위에 놓인 피자 상자를 보고 큰 소리로 말했다.

"와, 피자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피자인데."

"어? 피자를 싫어한다고?"

당황스러웠다. 생긴 건 가리는 거 하나도 없을 것 같구먼, 피자가 싫으면 안 먹으면 되지 굳이 저렇게 밝혀야 하나, 괘씸하군. 너 살짝 찍혔어.


다른 친구들이 피자를 한 조각씩 먹는 동안 진이는 과자를 먹었다. 그나마 과자와 음료는 취향에 맞았는지 잘 먹었다.


아이들을 거실에서 놀게 하고, 나는 아들 방 책상 위에 노트북을 놓고 앉아 일을 했다. 잠시 후에 학원을 가야 한다는 친구가 나가고, 딸 포함 세 명의 아이들이 뭐가 신나는지 낄낄 깔깔 거리며 웃고 떠들었다. 방문을 너무 쾅쾅 닫고 물건을 자꾸 떨어트리는 바람에 신경이 온통 아이들 쪽으로 가 있는데, 진이가 내가 있는 방으로 살며시 들어와 머뭇거렸다.


"왜? 뭐 필요하니?"

"저, 젤리 있잖아요. 저게 요즘 핫한 건데, 유튜브 보니까 꼬치에 끼워서 그게 뭐더라, 그걸로 하면 탕후루 처럼 된대요."

아이가 손가락으로 뭔가를 누르는 동작을 하며 단어를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설탕?"

"아뇨. 설탕 아니고..."

그래, 설탕이 잔뜩 들어간 젤리에 설탕을 입힌다는 건 아닐 테고? 아이의 손동작에서 떠오른 단어가 있었다.

"라이터?"

"네!"

젤리를 꼬치에 끼워서 라이터로 지져 살짝 녹이면 탕후루 느낌이 난다는 말인 것 같다. 나는 잠깐 고민했다. 해줘야 하나? 하지만 우리 집은 인덕션을 쓰기 때문에 가스불이 없고 라이터도 없다.


"그건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위험할 것 같아."

그날 아침에 옆 동네에서 불이 났다는 문자를 받았었다. 지금 못해준다고 하면 아이가 집에 가서 해보려고 할까 싶은 걱정이 들어 위험하다고 말해줬다.


요즘 핫하다는 젤리


진이가 방에서 나가 다른 아이들한테 가서 말했다.

"안된대. 제기랄."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이 낄낄거렸다. 헉, 내가 뭘 들은 거야. 나가서 그런 말은 쓰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한마디 해줘야 하나. '제기랄'이 그냥 웃긴 말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이 부모가 아이 앞에서 그런 말을 쓰나. 피자가 싫다고 할 때부터 별로였는데, 저렇게 거친 말까지 쓰다니, 딸한테 앞으로 진이랑 놀지 말라고 해야 하나? 나는 방에서 고민을 하며 아이들이 또 무슨 말을 하나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이들이 보드 게임을 하면서 조금 조용히 노나 싶었는데, 잠시 후에 누군가의 전화벨이 울렸다. 진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하고 전화를 받았다. 진이의 아빠인 듯했고, 통화음이 커서 내게도 다 들렸다.

"너 어디야?"

진이 아빠의 목소리에서 화가 났다는 느낄 수 있었다.

"공원이요."

"너 아빠가 해 놓으라는 거 하나도 안 했더라. 그것만 해놓고 나가면 아빠가 아무 말 안 하잖아."

학교에서 돌아오면 꼭 해야만 하는 학습지 과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진이는 계속 거짓말을 했다. 아빠가 빨리 들어오라고 하자 집 앞 공원이 아닌 길 건너 멀리 있는 공원이라고 말했다. 거짓말을 하는 게 익숙한 듯 진이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아이들은 돌아갈 채비를 했다.

"왜 공원에 있다고 했니?"

내 물음에 진이는 난감한 표정이었다.

"아빠가 친구네 가지 말라고 하셔?"

"네"

그 부분은 이해가 된다. 나도 아이가 놀겠다고 나가면 친구네 가지 말고 공원에서만 놀라고 한다. 아이가 친구네서 폐를 끼칠까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 그래도 부모님한테 거짓말을 하는 건 좋지 않아. 넌 어차피 밖에 있으니까 공원이나 친구네나 똑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중에 부모님이 네가 거짓말 한 걸 알게 되면 다른 일에도 거짓말을 했다고 오해하실 수도 있어."

"네"


아까 피자가 세상에서 제일 싫다고 말하고, 젤리를 라이터로 지져주지 않는다고 '제기랄'이라고 할 때는 얄미워 보이더니, 친구가 생일이라 잠깐 놀다 간다는 말도 못 할 만큼 무서운 아빠한테 꾸중 듣고 의기소침해진 아이가 안쓰러워 보였다.


"넌 뭘 좋아해?"

"저, 파스타요."

"그래? 아줌마 파스타 진짜 잘하는데. 다음에 놀러 오면 파스타 해줄게. 어떤 파스타 좋아해?"

"제가 좋아하는 파스타는 그 식당에서만 먹을 수 있어요."

"아, 그래..."

딸의 절친, 남사친과 친해지기 참 힘드네.


지윤이는 오늘도 공원에서 진이랑 진이네 강아지랑 신나게 놀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