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동안 너무 게을러져서 의욕 없이 지내다가 최근에야 힘을 내 뮤지컬 티켓 한 장을 예매해 두었는데, 초등학교 4학년인 막내딸이 귀신같이 내게 물었다.
"너 어떻게 알았어? 엄마 내일 뮤지컬 보러 갈 건데."
지난 수요일, 잠실 샤롯데 씨어터에서 3시에 공연하는 뮤지컬 <헤드윅>을 보기 위해 회사에 반차를 신청했다. 점심을 먹고, 2호선 지하철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다가 깨보니 지하철이 한강을 건너고 있었다.
잠실역에 도착한 시간은 2시 45분. 잠실역은 너무 넓고 복잡하다. 샤롯데 씨어터를 처음 가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급하니 방향이 헷갈렸다. 5분 전에야 겨우 도착해서 자리에 앉았다.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트랜스젠더 가수 헤드윅으로 분장한 배우 유연석이 객석 뒤쪽 통로에서 걸어 나왔다. 진한 화장과 금발머리 가발, 쇼트팬츠에 망사스타킹을 신은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나는 자리가 중간이라 안타깝게도 그의 손을 잡는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이 뮤지컬은 헤드윅이 공연을 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진행되며, 기존에 봤던 아름답고 화려한 뮤지컬과는 거리가 멀다. 헤드윅의 대사 절반은 욕과 우울한 이야기들 뿐이고, 희망이라곤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유쾌하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었던 건, 이 이야기가 단순한 트랜스젠더 가수의 이야기라기보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진정한 사랑을 만나고 싶어 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비중이 매우 큰 공연이었는데, 배우 유연석이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붓고 있다고 느껴질 만큼 매력적인 헤드윅의 모습을 보여줬다. 다시 생각해 봐도 설레는, 정말 멋지고 황홀한 공연이었다.
공연이 끝난 시간은 5시 30분, 서둘러 집에 돌아가면 아이들과 저녁식사를 할 수 있다. 내가 평일 낮공연을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아이들의 저녁밥이다. 그런데 오늘은 지하철역과 다른 방향에 있는 석촌호수 쪽으로 자꾸만 눈길이 갔다. 벚꽃이 만개한 이 계절에 여기까지 왔는데,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나는 횡단보도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마침 막내딸(초등 4학년)로부터 전화가 왔다.
"엄마, 나 오늘 7시까지 공원에서 놀아도 돼? 친구네 강아지 산책시켜 주고 싶어."
"배 안 고파?"
"응, 괜찮아."
딸아, 고맙다. 30분 정도 편하게 벚꽃길을 걸어도 되겠다. 벚꽃이 만개한 호수 주변을 돌면서, 놀이기구를 타는 사람들의 함성을 들으면서, 정답게 사진을 찍는 연인과 가족들을 보면서, 입가에 미소를 짓고 천천히 걸었다. 이 행복한 기분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석촌호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친구가 생각나 전화를 걸었다.
"나 석촌호수에 있어. 벚꽃 만개했다."
"난 아직 못 가 봤는데, 누구랑 왔어?"
"혼자. 혼자 뮤지컬 보고 산책하는 중이야."
"와, 부럽다. 나도 예전에 돈 벌 때는 공연도 보러 다니고 했는데, 남편 돈으로는 못하겠어."
"공연은 못 봐도 벚꽃은 꼭 보러 나와."
친구는 살림을 하고 아이를 돌보는 일을 하고 있는데, 자신의 통장으로 입금되는 돈이 없으니 자신을 위해 돈을 쓰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 기분은 나도 전에 느꼈던 적이 있기에 친구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론 속상하다. 집 안의 돌봄 노동과 가사 노동은 무료로 제공되는 게 당연하고, 누가 돈을 주지도 않으니까.
아이를 돌보는 일은 한 사람의 일생을 좌우하는 일이다. 뮤지컬 헤드윅의 주인공은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불행하게 살았던 것으로 그려진다. 또 다른 많은 이야기 속에서도 어릴 때 부모와의 관계가 한 사람의 일생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듣고는 한다. 자녀를 돌보는 부모가 돌봄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동시에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면 좋겠다. 엄마가 불행한데 아이가 행복할 수는 없으니까.
돌아보면 사실 나도 그랬다. 집에서 살림과 육아만 전담할 때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나를 위해 돈을 쓰지 못했다. 10년 넘게 그렇게 지내다가, 7년쯤 전부터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내 통장으로 돈이 입금된다고 해도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를 위해 돈을 쓰기는 여전히 망설여졌다. 그게 뮤지컬 같이 값비싼 취미생활이라면 더욱 그렇다.
뮤지컬 티켓을 사기 전에 이 돈으로 아이들이 원하는 걸 더 해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자신의 즐거움에 돈을 쓰는 것에 익숙하고, 앞으로도 살 날이 많으니 이런 기회가 많을 것이다. 반면 내가 즐거울 수 있는 기회는 나 스스로가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가끔씩 의무적으로 뮤지컬 티켓을 예매해서 나한테 선물한다.
흔히들 "꽃길만 걸으세요"라는 말을 하는데, 살면서 언제나 꽃길만 걷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꽃길을 걷듯 즐거운 마음을 조금 더 오래 느낄 수는 있지 않을까. 내가 나에게 선물한 날들은 마음속에서 꽃이 되고, 그 꽃이 모여 꽃길이 되었다. 마음이 우울한 날, 마음속 꽃길을 따라 걷다 보면 나는 어느새 괜찮아진다.
오늘 글을 쓰며 생각해 보니 조금 잘못한 일이 있다. 30분 동안 석촌호수 반바퀴를 산책하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 후회된다. 아이들 저녁밥을 챙겨주기 위해서였는데, 그냥 호수 한 바퀴를 다 돌고 올걸 그랬다. 배달어플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건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