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그나마 결심이 오래가서 17일 만에 깨졌다. 회사에서 몇 년간 안 하던 회식을 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회식이면 소갈비 정도는 사줘야죠, 사장님. 쩨쩨하게 닭갈비가 뭐예요?"
라는 마음의 소리 대신,
"와, 저 닭갈비 엄청 좋아해요. 잘 먹을게요. 하하하."
회식자리에서는 전도연 뺨치는 연기가 필요한 순간이 있는데, 이게 맨 정신으로는 잘 안된다.
지난 주말에는 건강 프로그램에서 삼겹살을 먹는 장면이 나왔다. 삼겹살을 너무 자주 먹으면 건강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게 결론이었는데, 우리는 그게 삼겹살 먹방으로 보였다. 당장 삼겹살을 사다가 굽고, 삼겹살에 빠지면 섭섭한 소주도 한 잔 했다. 평소 대화가 별로 없는 우리 부부는 술이라도 마셔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눈다.
역시 술은 원활한 사회생활과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끊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술을 끊겠다는 결심을 '혼술'을 끊겠다는 결심으로 살짝 바꿨다. 심심하니 맥주나 한잔 할까, 하는 마음만 참아도 술이 많이 줄 것이다.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방학이 되니 아이들 고깃값이 정말 많이 드는데, 오늘은 너무 반갑게 돼지고기 앞다리살을 할인판매하고 있었다. 수육용으로 두 근을 샀다.
고기를 샀으니 자연스럽게 술 냉장고 앞으로 갔다. 남편한테 전화를 걸었다.
"자기야, 오늘 저녁에 수육 할 건데 막걸리 한 잔 어때?"
"미안, 나 오늘 약속 있어."
수육에 막걸리를 먹을 수 없다니... 섭섭하지만, 1리터짜리 맥주 페트병 하나만 집어 들었다.
혼술은 안 한다면서 술을 왜 집느냐고? 이 술은 내가 먹을 게 아니다. 얼마 전에 브런치 홈에서 본 글에맥주로 고기를 삶으면 간편하고 육질도 부드럽다는 기막힌 정보가 있었다.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
냄비에 고기를 넣고 맥주를 콸콸콸 따라주었다. 돼지가 취해서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20분 삶고 뒤집어서 또 20분을 삶았다.
돼지고기, 맥주, 소금, 설탕 한 스푼 넣고 푹 삶는다
내가 애정하는 맥주를 돼지한테 먹였더니 정말 맛있는 수육이 완성됐다. 맥주 외에 넣은 거라고는 소금, 설탕 한 스푼뿐인데... 아이들이 감탄하면서 먹는다.
잡내 없고 부드러운 수육이 완성됐다
"엄마, 완전 맛있어. 근데 우리 취하는 거 아냐?"
"걱정 마셔. 알코올은 끓이면 다 날아가."
고기가 정말 맛있는데 뭔가 허전하다. 주방에 돼지한테 먹이고 남은맥주병이 보인다.
자석에 이끌리듯 맥주병 앞으로 다가갔다. 삼분의 일 가량 남은 맥주를 컵에 따랐다. 생각해 보니 내가 지금 술을 마셔도 이건 혼술이 아니다. 돼지랑 같이 마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