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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Oct 13. 2022

눈치 빠르고 무섭고도 사랑스러운 매니저가 생겼다

초보 러너 훈련 일지 #3


2022년 9월 20일 (화)

10월 15일에 뚝섬 한강공원에서 열리는 국제연맹 런페스타에 참가 신청을 했다. 이번엔 10km다. 일하면서 눈에 약간의 불편감을 느꼈는데 동료가 눈이 충혈되었다고 했다. 거울을 보니 오른쪽 눈 반쪽이 새빨갛다. 토끼인 줄 알았던 거북이였다고 너무나 실망이 컸던 것일까. 토끼 눈이 되다니. (훈련일지 #1,#2에서 내 기록이 빠르다고 대회 나가서 1등 하겠다고 까불었다. 막상 대회 나가보니 그동안의 기록이 잘못된 것이었다. 겨우겨우 5km를 34분에 완주했다.) 네이버 검색 결과 각막하 출혈로 자체 진단. 그냥 두면 괜찮아진다고 한다. 눈이 이렇게 되고 보니 내가 매우 불쌍해 보여 연습은 내일부터 하는 걸로.


2022년 9월 21일 (수)

추석에 선물로 들어온 홍삼을 먹었다. 항상 남편에게 주었는데 이번에는 말없이 내가 먹는다. 새로 설치한 달리기 앱 '런데이'를 이용해 연습에 도움을 받았다. 휴대폰에 기본적으로 깔려있던 S사 앱에 비해 여러 가지 연습 프로그램이 있고 달리는 동안 심심하지 않게 계속 떠들어 주어 좋다.

오늘은 '3분 걷기-10분 달리기-2분 걷기-10분 달리기-2분 걷기-10분 달리기-3분 걷기' 프로그램으로 연습을 했다. 왼쪽 무릎이 조금 불편해서 신경을 쓰니 더 안 좋은 것 같다.

연습은 주 3회 (화, 목, 토) 예정이다.


2022년 9월 24일 (토)

달리기 동호회에 가입하면 어떨까 해서 검색을 했다. 장점은 여러 가지 정보를 얻고 배울 수 있다. 같이 달리면 재미있을 것 같다. 단점은 모임을 위한 장소에 가기 위한 시간이 소모된다. 새로운 사람들에게 적응하려면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 결론은 그냥 혼자 하자.

오늘은 '3분 걷기-15분 달리기-2분 걷기-15분 달리기-3분 걷기' 프로그램으로 연습을 했다. 달리는 동안 앱에서 '일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책 내용을 소개해 주었다. 재능이 없어도 일만 시간을 노력하면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이야기에 힘이 나려다가 생각한다. 세 시간씩 십 년을 해야 일만 시간인데, 삼십 분씩 달려서 도대체 언제? ㅋㅋ 내 목표는 '달리기를 즐기는 러너'라는 걸 잊지 말자.


2022년 9월 27일 (화)

막내딸을 매니저로 고용했다. 내가 연습을 하지 않으려고 꾀를 부려도 나가야 한다고 말해주기로 했다. 저녁을 먹고 피곤해서 누웠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딸이 와서 일어나라고 했다.

"엄마 5분만 더 자고 나갈게."

"엄마가 나가고 싶을 때 나가. 하지만 안 나가는 건 안돼. 꼭 나가야 돼."

무서운 매니저의 단호한 목소리에 잠이 확 깼다.

오늘은 '3분 걷기-30분 달리기-3분 걷기' 프로그램으로 한 번에 30분간 달리기 연습을 했다. 기록 상관 안 하고 달리기를 즐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신이 안 난다.


2022년 9월 29일 (수)

내일 저녁에 일이 있어 연습을 당겨서 했다. 오늘은 5km를 목표로 두고 달렸다. 5km를 천천히 달리니 36분 정도가 걸렸다. 기록을 상관 안 하려고 했는데 평균 기록에 못 미친다는 사실에 마음이 흔들린다. '평균 이하'라는 말은 승부욕을 자극하곤 한다. 평균은 해보자. 5분만 당기면 된다. 넌 할 수 있어.


2022년 10월 1일 (토)

낮에 언니, 막내딸과 함께 북한산에 갔다. 둘레길만 살짝 걸을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등산을 했다. 3시간가량의 등산을 마치고 집에 와 잠깐 자고 일어났더니 다리가 안 움직였다. 연습을 못 나갔다. 10월 15일 달리기 대회에 참가 신청만 하고 결제를 미루고 있었다. 연습도 게을리하는데 이러다 안 나갈 수도 있겠다 싶어 결제를 했다. 이제 집중하자.


2022년 10월 4일 (화)

달리기를 하면서 가장 힘든 건 집에서 나가는 것이다. 저녁을 먹고 누운 침대 위가 그렇게 안락할 수가 없다. 눈치 빠른 매니저가 내 마음을 눈치채고 같이 나가자고 한다. 매니저의 킥보드를 챙겨 공원에 갔다. 킥보드를 조금 타다가 집에 가자고 하지 않을까 은근 기대했는데 내가 3km를 달리는 동안 묵묵히 밤공기를 가르며 스피드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그래, 나도 즐겨보자. 그동안 한 번도 피곤하지 않은 날은 없었다. 피곤할 때마다 멈추었다면 한 번도 끝까지 달려보지 못했을 것이다. 갈등은 3km까지다. 3km가 넘어가면 몸에 땀이 나면서 내 안에 나를 짓누르던 답답함, 무기력 같은 것들이 빠져나가 버린 듯 상쾌해진다.


2022년 10월 6일 (목)

내가 달리기를 하는 공원에는 여러 모습의 사람들이 있다. 달리기가 지루해지면 말을 걸곤 한다. 물론 나만 들리게. 담배를 피우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폐 다 썩는다. 웬만하면 끊어라~' 항상 열심히 걸으시는 아주머니들께 '오늘도 파이팅!' 달리다가 부딪칠 뻔하자 C가 들어가는 말을 내뱉는 술 취한 남자에게 '넌 못 달리지? 나 잡아봐라~'


2022년 10월 10일 (월)

토요일에 갑작스러운 가족 회식으로 달리기를 하지 못했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오늘은 흐려서 달리기 딱 좋은 날씨이다. 불광천을 달릴 생각으로 오후 4시가 조금 넘어 집을 나섰는데 빗방울이 떨어졌다. 돌아가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 일단 걸었다. 가다 보니 빗방울이 멈췄다. 걸어서 30분 거리의 불광천에 도착해 달리기를 시작했다. 가족들과 산책을 나온 사람들 혹은 자전거를 탄 사람들 틈에서 홀로 달리기를 선택하는 건 내게 약간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타인의 속도,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달리기임에도 마음은 아직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맞은편에서 고령의 어르신이 느리게 달려왔다. 그분을 보는 순간 이렇게 젊은 내가 달리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달리다 보니 달리는 사람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7km를 달리고 또 30분을 걸어서 집에 들어왔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누우니 천국이 따로 없다. 사랑스러운 매니저가 생수를 가져다주었다. 아껴두었던 간식도 내주고 다리도 주물러 주어 팁으로 1000원을 주었다. 저녁을 먹고 책을 읽다 잠들었는데 눈 떠보니 아침이다.

"잘 잤어?"

남편이 어쩐 일로 다정하게 물었다.

"응, 눈 감았다 뜨니 아침이네~."

"자기라도 잘 자서 다행이네. 난 어제 탱크 지나가는 줄 알았잖아."

밤새 내 코 고는 소리에 잠을 못 잤다는 남편 ㅋㅋ. 불면증이었는데? ㅋㅋ


내가 5km를 달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분이 조금 넘는다. 주 3회 30분 이상 달렸더니 3주간 45km를 넘게 달렸다. 마라톤 풀코스를 달린 것이다. 계획대로 할 수 없는 날도 있었고, 하기 싫은 날도 많았다. 그래도 계속할 수 있었던 건 오늘 못 하면 내일 하면 된다, 그러니 절대 포기는 하지 말자는 나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아, 무엇보다 가장 큰 힘이 된 건 눈치 빠르고 무섭고도 사랑스러운 매니저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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