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만난 두 남자의 이야기
마침내 37년 2일이라는 긴 여정의 직장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매일 반복되던 출근이라는 단어가 나의 일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어느새 만 61세인 새내기로 또 다른 삶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과 마주한 지 3개월이 지나간다. 시시때때로 내 마음 어디선가 내일에 대한 희망과 절망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이런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흔들어댔다.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던 월급이 절반으로 줄어들어 연금으로 변경된 현실도 솟아나는 불안 중 하나였다. 퇴직한 선배 중 어떤 이는 새로운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그간 취하지 못했던 여유를 갖고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며 상반된 삶을 권유하였다. 나는 일단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지출을 줄일 계획부터 세워야 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자. 용기를 내어 출근길에 동행했던 자동차를 처분하였다.
자동차 없이 시작된 날은 외출 시마다 매번 작은 용기가 필요했다. 인터넷의 길 찾기는 이런 나에게 믿음직한 벗이자 동행이 되어 주었다. 시간이 거듭될수록 불편한 감정들이 서서히 희석되어 어느덧 나는 대중교통의 달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지금은 버스나 지하철에서 스쳐가는 사람들의 표정과 복장을 지켜보며 나름대로 그들의 삶을 추측해 보는 버릇도 생겼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독특한 형태의 다양한 건물들과 나를 봐달라고 외치는 듯한 형형색색의 간판들은 늘 새롭게 다가왔다. 어느새 이 모든 순간들을 즐기고 있는 나를 마주하고 놀랍기까지 했다.
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받고 있던 수업을 마치고 평소처럼 귀갓길에 버스를 탔다. 그 시간의 버스에는 늘 빈자리가 보였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벌써 서서 가는 몇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앉아 가리라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버스의 중간쯤에서 차량 위에 매달린 손잡이와 함께 두 다리로 무게 중심을 잡고 섰다. 그리고 평소처럼 차창 밖의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버스가 한 승강장에 도착했을 때 서너 명이 앞문으로 우르르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 이때 작은 키의 왜소한 체격에 중절모를 푹 눌러쓴 80대 전후반으로 보이는 노신사가 구부정한 자세로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이 나의 시선을 끌었다. 노신사는 힘겨운 듯 느린 걸음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요금 결제가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소리가 났음에도 노신사는 자리에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기만 할 뿐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양보해 줄 자리를 찾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어느 곳에 서야 앉아 있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지 고민하는 중일까. 순간 그의 속마음이 궁금해졌다.
양옆으로 늘어선 앞쪽 1인석 좌석에는 피로에 지친 듯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여학생, 휴대폰에 정신없이 심취해 있는 청년, 장바구니를 품에 안은 채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아주머니 등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노신사에게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곧 출발해야 한다며 다그치는 버스 기사의 한마디가 들려올까 봐 괜히 바라보는 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때였다. 앉아 있던 승객 중 한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노신사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다가간 노신사는 미안함을 잔뜩 머금은 표정으로 앉으면서 그에게 "그쪽도 나이가 적지 않아 보이는데 자리를 양보해 주어서 정말 고맙소."라며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제가 보기에 그렇게 보여도 어르신보다는 훨씬 젊습니다."라며 재치 있게 화답한 뒤 앉았던 자리 반대편인 내 옆쪽으로 와서 서는 것이었다. 그들의 대화에는 서로에 대한 따뜻함이 묻어났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남자의 얼굴로 향했다. 순간 깜짝 놀랐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깊게 드리워진 주름들, 눌러쓴 챙 모자를 벗어 숱이 적은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는 투박한 손길은 영락없는 70대 전후반 남성의 모습이었다. 이 나이에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그의 얼굴에는 무안함인지 흐뭇함인지 모를 미소가 가득 번져가는 중이었다. 그 미소는 보는 내 마음까지도 덩달아 흐뭇하게 물들였다.
퇴직 후 새로운 인생을 향한 항해 중 만난 하루였다. 오늘 본 두 사람에게서 미래에 맞이하게 될 내 노년의 일부가 겹쳐 보였다. 세월이라는 풍랑만은 쉬이 비켜 갈 수 없겠지만 두 사람의 모습 속에는 서로를 향한 배려와 공감이 깊이 숨어 있는 듯했다. 그들은 세월을 받아들이며 최선을 다해 현실을 살아가는 행복한 사람들로 여겨졌다. 그래서인지 아련하게 다가온 버스 속 오늘의 풍경은 오랜 기간 내 가슴속에 머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