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선물

산자와 죽은 자의 만남

by 감성마루

살다 보면 오래 머무는 기억들이 있다. 그 추억에 애틋한 사연이 있고 충격으로 다가왔다면 더 오래 머물게 되는 것 같다. 내게도 그런 기억이 있다.


오래전 일이다. 열 살, 열여섯 살, 열여덟 살인 삼 남매를 둔 사십 대 엄마이자 한 남자의 아내인 동서가 생을 마감했다. 시동생은 결혼 당시 외항선의 기관장이라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허락된 시간은 고작 일 년에 두어 번 정도였다. 흐르는 시간만큼 아이들과는 서먹함이 쌓여갔다. 부부는 결혼 후 함께 생활했던 시간보다 떨어져 지낸 날이 더 많았다. 남편의 귀국 일만 기다리며 홀로 삼 남매를 키운 동서는 항상 미소 띤 밝고 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시동생의 집이 순천이라 부산에 사는 우리 부부와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집안 행사가 있거나 시동생 귀국 시 잠시 만날 정도였다. 제사가 있어 순천 큰 집에서 동서를 만났을 당시, 비밀을 지켜달라며 백혈구 수치가 떨어져 고민이라고 하였다. 좋아질 수는 없지만 매달 병원을 방문하여 추적 관찰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병원에서 수치를 확인해야 하는 날이 다가오면 두렵고, 입원해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될까 봐 걱정된다고도 했다. 나는 “괜찮을 거야.”라는 상투적인 말로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결국 백혈병 진단을 받았고,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투병 생활을 시작했다. 과다한 병원비와 가족 생계라는 무게 때문에 바다로 떠난 시동생의 보살핌은 받을 수 없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유일한 치료 방법인 이식수술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팔 개월 만에 실패라는 참담한 결과를 마주해야 했다.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 각자가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를 견디느라 가족 중 누구도 임종을 보지 못하였다. 외롭고 쓸쓸한 죽음이었다.


나흘간의 장례를 끝냈다. 삼 남매는 투병으로 짜증이 늘어났던 엄마를 본 탓인지, 오랜 기간 떨어져 지냈던 탓인지 생각보다 의연하게 잘 버텨주었다. 아내의 빈자리를 채우며 아이들을 돌봐야 할 시동생의 뒷모습은 한없이 무겁게 보였다.


지인들이 모두 떠나가고 시동생 가족만 덩그러니 남았기에 우리 부부는 그 집에서 하룻밤 더 머물기로 했다. 인근 식당에서 얘기를 나눌 동안 삼 남매는 마당 한 모퉁이에 머리를 맞대고 쪼그려 앉아 속닥거리고 있었다. 서로의 슬픔을 달래주고 있는 듯 보여 안쓰러웠다. 동서가 떠난 휑한 집으로 돌아와 방에 있는 아이들을 불렀을 때 반응이 없었다. 방문을 열고 아이들이 앉아 있는 침대 옆 탁자에 과일을 올려 두고 돌아서려 할 때였다. 큰 조카가 할 말이 있다며 나를 불러 세웠다.


“큰엄마, 엄마가 집에 와서 우리랑 함께 있어요.”

이게 무슨 일인지. 예상치 못한 조카의 말에 당황했다. 그 내용은 이랬다. ‘식당 인근 산 중턱에서 평소 가장 좋아했던 옷을 예쁘게 차려입은 엄마가 다가왔다. 집으로 가자고 하여 함께 아빠 차를 탔다. 도착 직후 샤워하고 나온 엄마가 피곤하다며 침대에 누운 뒤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하여 타다 놓았다.’라는 것이었다. 엄마를 보고 소통할 수 있는 막내를 통해 지금 대화 중이라고 했다. 놀랍게도 침대 옆 탁자 위에 커피가 담긴 예쁜 잔 하나가 덩그러니 올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믿기지 않는 내용이었지만 너무 구체적이라 상실감이 낳은 허상이라 치부할 수만도 없었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그렇게 만든 것일까. 정녕 어린 아들이 마음에 걸려 떠나지 못한 동서가 찾아온 것은 아닐까.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며 스쳐 갔다. 옆에 있던 시동생은 눈시울이 붉어졌고 얼굴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충격이었다. 모두를 감싸고 있던 슬픔까지 내려놓아야 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경험이 많은 지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덤덤한 목소리로 “그 나이에 충격적인 일을 겪으면 영혼을 보는 경우가 간혹 있어요. 시간이 지나 엄마가 죽었다는 현실을 자각하고 두려움을 느끼게 되면 자연스럽게 떠나갈 거예요.”라고 말해주었다. 혼란스러웠지만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뿜어져 나왔다.


부산에 온 지 일주일이 되었을 무렵 시동생에게 전화했다. 막내는 간혹 “아이고,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며 안아주는 엄마를 만난다는 것이었다. 걱정되지만 그래도 지인의 말을 믿고 기다려보자며 위로를 건넸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전화가 걸려 왔다. 막내가 자신도 모르게 “엄마 죽었잖아, 무서워.”라고 말하자, 그 후 엄마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지인의 말이 맞았다. 거짓말 같은 이별이었다.


아들의 이 한마디에 홀연히 사라졌다니 가슴이 먹먹했다. 이렇게 소설 같은 일이 열 살인 조카에게 일어났다.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었고, 경이로운 만남을 가졌으며, 또 그렇게 떠나보냈다. 그때부터 삼 남매가 어색하다던 시동생은 해외에서 매일 컴퓨터 화상통화로 소통했다. 떨어져 있어도 함께했고 사랑은 단단하고 깊어졌다. 애틋한 가족애는 동서가 남긴 마지막 선물이 되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애타는 모성애가 빚어낸 그 사건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전남 구례에 갈 때면 하늘공원을 방문하여 그곳에 있는 동서를 만난다. 어느새 이십 대 후반의 청년으로 자란 막내는 어엿한 직장인으로 잘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걱정하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