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이 느리게 간다는 것.
내가 심장이 막 뛸땐 다 안좋을 때던데. 당황했을때, 화났을때, 100미터 달리기 하기 전. 다 안좋을때야. 한번도 좋아서 심장이 뛴적이 없어. 정말 좋다 싶을 땐 반대로 심장이 느리게 가는것 같던데. 뭔가 풀려난 것 같고. 처음으로 심장이 긴장을 안한다는 느낌
편안한 것과 좋은 것을 구분할 수 있을까? 딱히 이야기할 꺼리가 없어도 마주 앉아 술 한잔 마실 수 있는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인가? 만만해서 그런걸까? 잘 모르겠다. 긴장감이 없는 관계는 쉽게 질리고 지루해져서 오래 지속하기가 어려웠다. 만나면 재미있고 신나기도하고 뭔가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좋아했던 나로서는 편안한 것과 좋아하는 것은 정확하게 구분이 지어졌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반복해서 즐기는 것이 좋다. 신간보다는 내 방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을 다시 읽기를 좋아한다. 똑같은 디자인이라도 실의 컬러를 달리해서 새로 떠보는 뜨개질이 더 좋다. 익숙한 것이 좋다. 이젠 나를 긴장시키고 경직되게 만드는 것은 멀리하게 된다.
좋을 땐 그냥 좋아. 근데 심장이 뛸땐 잘하면 가질수 있겠다 싶을때, 폭풍치는 기대 심리 이런거. 내껀 그냥 내껀가부다 해. 내께 아닌데 아닌걸 알겠는데 잘하면 가질수 있겠다 싶을때, 그때 뛰는거야, 심장이.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심장이 마구 날뛴다고 한다. 심장이 내 귀 옆에 놓여 있는 것처럼 쿵쾅거리는 소리가 엄청 크게 들리기도 한다. 말이라도 한마디 해 보려고 하면 내 목소리는 모기 소리처럼 작아진다. 지나가고 나면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떻게 말을 했는지조차 기억나질 않는다. 옆에 있던 친구가 등을 토닥이며 위로한다. "너, 저 사람 정말 좋아하는구나..."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음, 너구나~. 그냥 내껀거야 인연은 자연스러워. 갈망할게 없어. 너 부자들이 명품 갈망하는거 봤어? 그냥 사지. 내가 뭔가 죽어라 갈망할 땐 저 깊은 곳에서 이미 영혼이 알고 있는거야 . 내께 아니란걸. 갖고 싶은데 아닌걸 아니까 미치는거야.
그래, 갈망은 결핍에서 오는거지. 이미 가지고 있다면 갈망 따위 없지.
왜 좋아한다고 말하는게 그렇게 힘들까. 싫어한다는 것도 아니고 좋아한다는데.
좋아한다고 말하는 순간 상대방에게 내 감정을 알아달라, 나를 좀 봐달라는 요청을 하는 것 아닐까?
"내가 당신을 좋아합니다. 그 감정이 커져서 나 혼자 감당하기가 버거워졌습니다. 같이 짊어져 줄 수 없을까요?"라고 말이다. 상대방도 같은 마음이면 정말 땡큐지만 그렇지 않았을 때는 어마어마한 부담감을 부여하게 된다. 상대방이 나를 대할 때의 행동이 자연스러울 수가 없게 된다. 그러니 함부로 고백을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거절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다.
영혼이 알잖니, 백퍼 까인다는거. 할까말까 망설이다 하는 말중에 해서 후회 안하는 말이 없다. 하면 안된다는걸 아니까 망설이는거야. 근데 굳이 말을 해가지고 안좋은 끝을 보고 말어. 인간이 그렇게 알 수 없는 동물이다.
보통의 경우에는 고백을 하기 전에 상대방에 대한 사전 조사를 한다. 애인이 있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취향은 어떤지 등등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취합하는데 그 때마다 나와 비슷한지 다른지를 판단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느낌이 온다. 아, 이 사람은 나를 받아줄 수 있겠구나 아니면 나를 감당하지 못하겠구나와 같은 느낌이 온다. 그리고 예감은 늘 적중한다. 그래서 할까말까를 망설이게 된다.
그냥 미친척하고 얘기나 해 볼까? 싶으면 그 사람을 다시는 안 볼수도 있다는 각오로 비장하게 고백을 한다. 결국 안좋은 끝을 보고 마는 것이다.
성에 안차는 놈들이 자기 좋다고 하면 무슨 모욕 당한것 처럼 펄쩍 뛰고. 여자들 있지, 자기보다 아래있는 남자가 자기 좋다고 그러잖아?! 그럼 진짜 죽일듯이 난리난다. 세상 모든 여자들이 다 그래.
나도 몇 번 고백을 해 본 경험이 있다. 하지만 늘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거절당한 상태를 돌아볼 자신이 없어서 괜찮은 척하며 넘겨버렸다. 스스로도 잊으려고 다른 일에 매달리며 시간을 흘려 보냈고 그러다보면 정말 잊혀져 버리곤 했다. 지금 돌이켜 봐도 아주 인상적인 고백은 없었다. 기억에 남는 거절감도 없었다. 결국 나는 내가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만큼의 마음을 주고 표현을 해보고 반응이 석연치 않으면 적당한 시기에 접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정작 나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들에게는 잔인했다.
편하고 좋은, 쉽게 말하면 친구같이 잘 지내던 친구가 이성의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하고 그 표현을 내가 감지하기 시작하면 아주 차갑게 선을 그었다. 애초에 고백조차 할 수 없게 말이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마음을 표현하기라도 하면 관계를 끊어버렸다. 마치 사귀다가 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성숙하지 못한 인간이 관계의 발전을 두려워하여 숨어 버렸던 것이다.
잘못된 관계를 만들었다가 범죄에 이용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종종 사건화 되면서 지금은 남성을 반 범죄자로 경계부터 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한국 사회에 만연하다. 그래서 낯선 사람이 말을 걸어오면 우선은 멀찌감치 서서 경계 태세를 취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분위기를 모르는 것인지 산을 타다보면 말을 걸어오거나 일정 구간을 따라오는 남자들이 있다.
팬데믹 영향으로 운동 조차도 자유롭게 할 수 없던 시기에 사람들은 산으로 모여들었다. 어느 때보다도 산행하는 인구가 부쩍 늘었다는 통계가 발표될 정도였다. 산 중턱의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서 자리를 펴고 싸가지고 온 음식들을 펼쳐놓고 긴 시간 머물다가 가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들에게 산 정상은 목적이 아니었다. 여럿이 앉아 먹고 마시고 놀다가 만만해 보이는 대상이 지나가면 말을 걸고 희롱을 해 보기도 하는 것이다. 목적이 같은 상대는 머물다가 함께 하산을 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온전히 산의 정상이 목표인 사람들에게는 다소 불편하다.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 뒤따라 오며 일정 구간을 같이 걸어가자고 덤비는 사람들에게 나는 혐오감이 올라 온다. 그들에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매우 불쾌하다. 모멸감도 느껴진다. 같이 놀자고 덤비는 인간들 눈에 그렇게 만만해 보이는가 싶어 나 자신을 자책하게 될 때도 있다.
남자들이 다 그렇다고 싸잡아 욕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염창희가 말한, 여자들이 나보다 못한 상대가 좋다고 하면 미친년처럼 난리를 치는 이유는 상대방의 태도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여자를 정말 존중하려는 마음이 있는 남자라면 자신의 마음을 고백할 때도 많은 고려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산에서 지나치다 만난 여자에게 한 번 놀자고 희롱하는 것처럼 고백을 한다면 지금은 싸다구 맞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