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는 배우송강호, 비주얼 깡패이면서 연기 또한 외모에 묻히지 않는 배우 강동원, 자신만의 독특하고 풍부한 감성으로 '나의 아저씨'를 세 번 이상 보게한 배우 이지은이 개성있는 캐릭터들을 연기한다는 것만으로도 기대감이가득할 것 같지만 예매를 하고부터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제 75회 칸영화제 초청작이라는 타이틀로 인해 부풀려진 기대감 때문에 영화를 제대로 느끼지 못할까 걱정되어 영화를 직접 보기 전까지 일부러 영화에 대한 정보를 접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더불어 영화를 만든 감독이 누구인지 알기에 두려운 마음을 떨쳐 내려고 기를 써야 했다.
작년 여름, 영화 '아무도 모른다'를 보다가 아직까지 결말을 보지 못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짠하고 화가 나고 두렵고 떨려와서 결말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여전히 다시 보기가 두려운 영화였는데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이 만들었다고 해서 기대와 두려움이 공존하는 마음이 컸다. 과연 그 감독은 베이비박스에 대해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했을까 궁금했다.
모성애라고는 없어보이는 엄마로부터 방치된 아이들이 덤덤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기들끼리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일상 다큐를 찍듯이 만든 것처럼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이들 아니면 그곳에 버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삶을 무심한 듯 그려낼까 궁금해서 이번 영화는 내 의지로 영화를 멈추지 못하게 영화관에서 보아야 했다.
베이비박스가 어느 교회에 있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영아살인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들었는데 듣고는 잊혀졌었다. 주변 사람들 모르게 아이를 낳고 쓰레기처럼 버리는 사건들이 빈번하게 발생한 후로 영아살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나서 나라도 책임져 주지 않는 새생명을 살려보자고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 이야기처럼,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관리감독이 느슨해지면 악용하는 사례들이 생겨나듯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이를 이용해 돈을 버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버리는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아이에 대한 어떤 정보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경우도 않다. 죄책감을 덜어내고자 기억을 없애려는 방어기재가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박스에 넣은 아이를 누가 데려가서 어디로 보내는지를 관찰, 관리, 감독하는 것은 전부 베이비박스가 설치되어 있는 교회의 양심에 달려 있다.
오랜 시간 제도권 밖에서 방치되어 있던 베이비박스는 이제 영아 판매의 도구로 쓰여지고 있었다.
아이 아빠를 죽이고 도주하던 여자는 그곳에 아이를 버리고 사라졌고 이를 목격한 경찰은 아이를 판매하는 현장을 덮치기 위해 지켜만 보고 있다. 교회 안에서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버려진 아이를 이용해 돈을 벌고자 벼르던 사람들이 아이는 살 사람을 구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박스 안에 넣어짐과 동시에 영화 속 등장 인물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면서 그 존재를 드러냈다.
그러나 반전은 초반에 일어났다. 아이 엄마가 버렸던 아이를 다시 찾으러 온 것이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아이를 되찾으러 애엄마가 돌아 올 것이라고. 그런데 온 것이다.
정식 절차로 입양이 어려운 부부가 뒷거래 방식으로 아이를 입양하는 경우가 있는 줄 몰랐다. 이 영화를 통해 입양의 이면도 직면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이 아빠에게 존재를 거부당한 아이를 끌어안고 세상 끝이라도 갈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듯하다. 결국 아이를 위해서도 자신과 같은 엄마가 없는게 더 나을 것이라 판단했을 것 같다. 잡히면 같이 감옥에 가야 한다. 아이는 살인자의 아이라는 낙인이 평생 붙어다닐 것이 뻔하다. 그럼 떠나주는 것이 이롭다...나같은 엄마는 엄마 자격이 없어...라는 감상에 젖어서 말이다.
그런데 돌아왔다. 그녀는 아이를 자신이 키워야 겠다고 생각을 바꿨던 것일까?
세상 많은 엄마들이 아이를 위해 아이를 버린다고 말한다. 하지만 부모가 버린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살아가게 되는지 정말 모를까.
이 아이는 아니겠지, 아니기를 바라고 어디선가 좋은 가정 안어서 잘 살겠거니 하며 자신을 위로하면서 살겠지.
모성애는 학습에 의해 길러지는 것이라는 의견에 찬성한다. 인간의 본능이 아니라 보고 배워 생겨나는 감정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모성애가 없는 여성을 비난할 생각도 없다. 배울 기회가 없었다는 것은 그들도 그 사랑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는 증거니까.
결국 애엄마는 자기가 낳은 아이에게 좋은 부모도 찾아주고 돈도 챙겨 보려는 생각을 하고 아이를 구하는 사람을 찾아 나서는데 동참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외부 사람들로부터 가족이라는 오해도 받는다. 하지만 그 기분이 싫지는 않아 보였다.
가족... 특별히 정해진 규칙이 있을 필요가 있을까?
서로 아끼고 위해주며 등을 기대어 쉴 수 있는 사람들이 함께 하면 가족이라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아이에게 좋은 부모를 찾아주기에 진심인 그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여행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모습이 바로 가족 같았다. 그게 가족이 맞다고본다.
피를 나눴지만 상처만 남기는 서류상 가족보다 백배천배 행복한 관계가 아닌가 싶다.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꿈틀거리는 상황에서 영화관람은 선물같은 일이었다. 팝콘도 마음껏 집어 먹고 말이다. 퇴근하고 바로 상영관으로 들어간 바람에 배가 고파서 영화 상영 전에 광고를 보면서 반 이상을 먹어버렸던 것이 다행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가족여행을 하는 것 같은 그들을 보느라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아무 것도 못했다. 억지로 눈물샘을 자극하지도 않았고 관객들에게 감정이입을 시키지도 않았다. 하지만 보는 사람들은 가슴으로 울었고 공감했다.
책임을 묻고 싶지 않다. 따지고 덤벼들고 싶지도 않다. 그냥 그 삶을 보았다. 그리고 나를 돌아 보았다.
과연 잘 살고 있는가.
순간순간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태어난 김에 건전하고 성실하게 살기로 했던 나와의 약속을 잘 지켜내고 있는가. 그리고 하나 더 추가하기로 했다.
타인을 대하는 나의 자세를 고쳐 보기로 말이다.
나의 작은 배려가 누군가를 잠시나마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다면 기꺼이 배려해 보기로. 배려받는 타인은 모를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