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발자 모드 속 마흔두 번째 이야기
적을 골탕 먹이려고 악의 없이 했던 발언이 친구를 죽음으로 모는 단서가 되어 돌아왔다. 그는 이제 평생을 이 ‘벽’에 갇혀 살아야 한다.
“난 벽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할 테고, 온 힘을 다하여 등으로 벽을 밀겠지. 그러면 벽은 악몽에서처럼 꼼짝하지 않겠지.”
그는 죽지 않았지만, 벽의 바깥에서 죽음보다 더한 공포 속에 살아갈 것이다. 장 폴 사르트의 〈벽〉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내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엄습했다. 주말 아침에 읽기에 전혀 개운치 않은 글이라서, 단편임에도 멈추기를 서너 차례 반복했다. 책의 한 방은 마지막에 있었다. 친구 그리스의 은신처를 밀고한 주인공 파블로의 증언 때문이다. 이 장면을 보기 전까지는 왜 제목이 ‘벽’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한 벽에 대한 단상은 위에 적은 문장이 유일했다. 재판을 가장한 사형 선고를 시작으로 사죄수가 되어 겪는 심리적 압박감, 집행 당일이 되었을 때 새벽빛에 들려오는 총성 소리 등 촘촘히 엮어진 장면의 묘사가 만들어내는 두려움의 비중이 더 컸다. 오히려 감옥에 갇힌 수감자 톰이나 왜 들어왔는지 모를 의사와의 대화가 더 인상적이었다.
파블로는 톰, 후앙은 같은 감방에 배치되어 총살을 기다린다. 셋 중 가장 어린 후앙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장 뚜렷이 보여준다. 톰은 처음에는 담담한 척했지만, 오줌을 지리는 행동을 통해 내면은 그렇지 않음을 나타냈다. 그들은 죄의 경중과 관계없이 사형을 선고받는다. 이 소설에서 정의 따위는 중요치 않은 것 같다. 마치 대기표를 받고 제 죽음을 기다리는 풍경이 한없이 암울하다. 파블로는 이러한 죽음의 문턱에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반란군 지도자의 행방을 말하면 살려주겠다고 장교가 제안한 것이다. 그는 밀고 대신 잘못된 정보를 적에게 건네주어 장난치기로 했다. 그러나 그리스가 그의 시나리오대로 움직이면서 장교들에게 발각되어 총살당한다. 그 덕분인지 파블로는 당장의 죽음을 피하고 허망하게 웃는다.
소설이 전개되는 내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짙게 깔려 있고 묘사 또한 실제 같아서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죽음과 벽, 그 사이에서 작가가 말하려는 메시지가 이해되지 않아 여러 번 읽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종내 생존한 주인공,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벽을 깨부수기 위해 악몽과 같은 삶을 살아내지 않을까. 우리 생의 도처에는 벽이 있다. 대다수가 그 벽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산다. 나도 내 안의 벽을 깨부수고자 글쓰기를 시작했지만 쉽지 않다.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기도 전에 현실의 나를 먼저 투영하면서 쓰기를 주저하는 부분이 많다. 작가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선 타인을 물어뜯으려 하거나 바지에 배뇨하는 원초적인 행동을 통해서라도 그 벽을 무너트리려 했을지 모른다.
소설의 ‘벽’으로 사고를 다시 돌렸다. 파블로는 생명을 담보로 한 심문 과정에서 친구의 은신처를 알려준다. 물론 거짓을 가장한 연극이었지만, 그의 양심 속에서 진실이 담겨있을 수도 있었다. 그는 연인 콘챠에 대한 사랑이 사그라지면서 그리스와의 우정도 사라졌다고 고백한다. 본인이 그 대신 죽으려는 생각도 전혀 없었다. 단지 삶에 대한 의욕이 꺾였기 때문에 이같은 결정을 했지만, 후앙과 톰이 그랬듯 목숨에 대한 갈망이 마음 깊숙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모든 인간은 사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쯤에서 조지 오웰의 《1984》가 떠오른다. 윈스턴 스미스도 고문을 받으면서 연인이었던 줄리아를 배신했다. 두 소설은 비슷하게도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본인의 안위를 먼저 생각한다. 결국 가장 큰 벽은 나 자신이다. 나를 넘어서야 벽을 허물 수 있다. 나를 똑바로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