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자유를 되찾기 위한 자본주의의 여정

괴발자 모드 속 쉰아홉 번째 이야기, 거대한 전환 이후 1부

by 돌뭉치

《자본주의는 당연하지 않다》의 저자 데이비드 하비는 19세기 전후에서 코로나 시대까지 자본주의의 여정에 관해 설명했다.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을 마치고 온 직후라 그의 설명이 자연스럽게 이해되면서 칼 폴라니의 사후 세계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자본의 의미와 유동성 방향, 마르크스가 주장이 추가되면서 자본주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거대한 전환을 포함해서 중세부터 지금까지 자본을 포함한 권력은 있는 자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개인의 자유 또한 그들에 의해 통제되었다. 경제적 자유주의나 신자유주의 또한 그들의 횡포를 지지하려는 이론에 불과하다는 게 결론이어서 씁쓸하지만, 다시 한번 저자의 생각을 좀 더 들여다본다.


장기간 거대한 자본의 흐름이 막히면 경제적·사회적 여파로 인해 세계인의 상당수는 대재앙을 맞게 될 것이고 일부는 생존조차 불가해질 수 있다. 이러한 시대를 지배하는 사상으로서의 ‘신자유주의’는 부와 권력을 소수 엘리트층에 집중시킨 계급 프로젝트로 규정했다. 자본가들은 노동력 착취와 임금 절감을 통해 이윤을 극대화했지만, 노동자들의 임금 감소에 따라 시장 축소의 어려움도 같이 경험했다. 심지어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로 말미암아 신자유주의 경제와 신 파시스트 정치가 동맹을 맺는 것으로 추정되는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사회주의는 진정한 자유를 추구한다. 이때의 자유는 기본적인 생필품이 제대로 관리되어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을 제때 확보할 때 극대화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집단적 행동이 추구하는 종착점을 개인의 자유로운 개발이라고 말했다. 하루 6시간 노동을 통해 기본적인 욕구는 해결하고 나머지 시간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사용해야 개인의 온전한 자유와 해방이 실현될 수 있다.


오늘날 성장 증후군의 발현에 따라 변화율은 중요하게 취급하는 반면, 총량은 부수적으로 치부한다. 심지어 끊임없이 팽창하는 자본은 소비자 선택권을 박탈해서 미중 대다수에게 특정한 생활양식을 강요하고 만다. 마르크스는 토지가 주 생산수단이었던 시기부터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자본이 축적되었다고 주장했다. 강탈에 의한 자본축적은 이미 형성되어 분배되었던 가치를 대중에게서 빼앗아 재분배하는데 요점이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부가 집중되는 기업 및 최상위 10%의 거대한 자산을 늘리는 데만 주목한다. 그럼에도 실현의 정치 및 노동의 분업과 관련된 사회적 재생산의 통합은 지난 세대를 거쳐 혁명적으로 변화 중이다.


자본가는 시장의 이윤율에만 관심 있지만, 노동의 착취 측정량이나 잉여가치 변화율에는 무관심하다. 따라서 노동 과정, 현대 소비주의, 정치적 과정, 전통적으로 우리 생활에 도움을 주었던 제도와 관련된 소외의 상황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특히,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기업은 효율과 수익률만 강조하고 지역사회의 삶에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공장 폐쇄의 정치 경향이 심화하면서 노동자는 더욱 소외당할 수밖에 없다. 코로나19가 시작되면서 제대로 먹힐 정책이 사회주의밖에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미국을 지배하고 있는 과두체제는 틀림없이 국가사회주의를 시행하려 할 것이다. 이런 상태를 방지하는 것이 반자본주의의 정치 임무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자본의 지정학적 이동이었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는 지역적으로 불균형하게 성장했다. 미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중앙아시아 및 아프리카로 공간적 해결이 진행되면서 자본의 복리 성장 논리가 지정학적으로 구현되었다. “중국의 미래가 자본주의의 미래인가?”라고 할 만큼 중국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다. 결국 미국과 일본, 중국에서 벌어졌던 일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도 동일하게 되풀이될 것이 자명하다. 이미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세계의 역사는 공동의 합의된 의도 없이도 세계 곳곳에서 유사한 자본의 흐름을 겪었다. 자본주의는 당연하지 않으므로 항시 현상에 대해 사유하며 삶을 살아가야겠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 중 당연한 것은 없다. 내가 자본을 소비함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확보할지언정, 타인에게는 또 다른 형태의 소외를 조장할지도 모른다. 두 저자를 통해 현실의 해석력을 갖췄으나, 아직 자본주의를 대하는 답을 찾지 못해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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