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의 삶을 그린 두 작가

괴발자 모드 속 쉰여덟 번째 이야기

by 돌뭉치

르누아르와 세잔을 만났다. 삼 년 만이다. 그들의 그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데, 나의 이해도가 높아졌는지 예전보다는 가깝게 느껴졌다. 여러 번의 유럽 여행을 통해 깨달은 바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점이다. 학생 신분으로 처음 프랑스에 갔을 때는 주머니 사정상 눈으로 작품을 담기에 급급했지만, 회사원이 되고 나서는 방문하는 모든 미술관마다 현지 투어를 신청했다. 한가람미술관에서 진행하는 오랑주리미술관 전시회도 도슨트 프로그램에 맞춰 참석했다. 평일이어서 한가할 줄 알았는데, 해설이 시작되는 홀에는 관람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엄마와 함께 온 초등학생도 눈에 띄었다. 도슨트가 전시장을 이동할 때마다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질문하는 아이가 있었던 반면, 엄마가 손으로 끌어 맨 앞으로 등을 밀어붙이는 아이도 있었다. 저 아이에게 과연 백 년도 훨씬 지난 이의 그림이 흥미 있을까. 다양한 문화를 보여주려는 엄마와 아들의 실랑이가 해설사 설명에 깨소금을 쳤다.


해설 시작 정각에 도착해서 미리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강연은 꼬박 한 시간 동안 이어졌다. 작품 해석은 물론 화가의 개인사까지 다채롭게 다뤘다. 같은 인상파임에도 두 작가의 화풍이 다른 이유도 소개됐다.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르누아르는 미술과 음악 다방면으로 재능이 있었지만, 바로 돈을 벌 수 있는 분야를 아버지가 권했다.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은 일로 시작했지만, 기계가 그 일을 대신하면서 본인은 본격적으로 미술의 길로 들어섰다. 르누아르 작품은 누가 봐도 아름다워서 구매욕을 부추긴다. 프랑스에서도 유일하게 그의 그림만 사 왔다. 영리한 화가다.


세잔은 은행가 집안 출신으로서 평생 금전적으로 힘들지 않았다. 평생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르누아르보단 작품을 팔아서 생계를 이어야 한다는 절실함이 덜했던 것 같다. 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본질을 나타내는 데 주력했다. 생전에 세잔의 작품은 잘 안 팔렸다고 했다. 심지어 그의 그림을 사고 싶어도 구매자가 세잔에게 연락할 방도가 없었다고 했다. 연이은 동료 작가와 대중의 비판을 피해 남프랑스로 이주하면서 그의 삶은 더욱 고립되었다. 르누아르와 세잔의 작품을 동시에 봤을 때 설명을 듣기 전에는 르누아르의 그림이 아름다웠는데, 이제는 세잔의 그림에 더 눈길이 간다. 평면적인 액자에서 그의 고집이 살아나면서 꽃, 사과, 나무까지 입체감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1889년에서 1980년에 걸쳐 그린 《푸른 꽃병》을 선택했다. 마냥 예쁜 그림보다는 계속 덧칠하면서 완성을 미뤘다는 세잔의 집념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혼자 미술관을 천천히 둘러봤다. 가까이서 보고 걸음을 옮겨 멀리서도 바라봤다. 많은 관객으로 인해 중간중간 초점이 막혔지만, 거리에 따라 보이는 그림의 면면이 달랐다. 백 년도 더 된 작품에서 떨림이 전달되다니, 예술의 힘은 대단하다. 말년에 파킨슨병으로 붓을 잡기가 힘들어 손에 붓을 천으로 매어 감고 그렸다는 르누아르의 그림은 나이가 들수록 붉어졌다. 원래 어두웠던 세잔의 그림은 스승 피사로를 만나고 나서 점점 밝아졌다. 평소에는 감상할 때 연도를 따지지 않았다. 도슨트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배우면서 연도와 작품의 분위기를 비교해 보니 따로 떨어진 그림 사이에 연결된 맥락이 보였다.


화가나 음악가, 글을 쓰는 작가 모두 그들의 전성기가 있다. 확실히 한창때 두 사람의 작품은 멋지다. 색감이 남다르고 붓 터치도 살아있다. 초창기에 투박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부드러워졌다. 자신의 스타일을 찾아가는 방식이 연대순으로 읽혀서, 나 또한 그림을 읽는 새로운 재미를 찾았다. 두 작가의 삶이 궁금해졌다. 작품만 봐서는 르누아르가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살았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반대였다. 알고 보면 궁금증이 늘어난다. 책을 통해 그들의 생을 만나봐야겠다. 아까 사 온 푸른 꽃병이 베이지색 벽과 함께 어우러져 귀티를 뽐낸다. 포스터 한 장으로도 실내가 윤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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