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가 허벌나게 좋다

괴발자 모드 속 쉰일곱 번째 이야기

by 돌뭉치

올해 두 달 간격으로 국내 여행을 다녀왔다. 2박3일로 강릉에 갔다가 짧게 느껴져, 여수는 3박4일로 하루를 늘렸다. 동행한 엄마는 나흘이 적당하다고 했다. 글쓰기를 시작하고 첫 목적지였던 강릉에서는 그날의 감정을 남기고자 매일 글을 썼다. 사흘 동안 네 건을 탈고했다. 반면, 여수에서는 한편도 못 썼다. 첫날부터 생리통으로 인해 수면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9시까지 버티다 뉴스를 켜놓은 채 잠들었다. 두통에서 벗어나야 다음날 일정도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아 들고 간 노트북은 켜지도 못했다. 거의 한 달 만에 여수 여행기를 쓴다. 당시의 생생한 기분을 살릴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지금 생각해도 최선이었다.


EXPO역에 도착하자마자 음식점을 찾았다. 엄마는 내 생일이니까 근사한 곳으로 가자 했지만, 통증 때문에 앉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지도 앱에서 가까운 갈치조림집을 골라 무작정 걸었다. 도보로 10분 이내여서 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언덕이 복병이었다. 캐리어를 끌고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갔을 때 사장님은 점심 영업이 끝났다고 했다. 근방에 후보 밥집이 없음을 확인한 나는 언덕을 내려가 대로변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앱도 켜지도 않은 채 아무 데나 들어가려 했다. 전라도 음식이면 기본 이상은 하리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품고선 땡볕에서 정신을 잃어갈 때쯤 갈치조림집을 발견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식당에는 점심시간인데도 손님 한 명 없었다. 다시 나갈 엄두가 안 나 자리를 잡았다. 이 인분을 주문하자마자 사 인용 식탁 전체에 빽빽하게 반찬이 깔렸다. 남도 요리는 대단했다. 심지어 미역국까지 세팅되면서 완벽한 생일상이 차려졌다.


호텔방문을 열었다. 정면에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다도해라서 수면 위로 드문드문 크고 작은 섬도 보였다. 가을 바다에 반짝이는 윤슬이 감탄을 자아냈다. 망망대해 강릉보다 아기자기 섬이 모여있는 여수가 엄마는 맘에 든다고 했다. 초일 일정은 자고로 호텔 도착이 끝이다. 여독을 풀기 위해 침대에 쓰러졌다. 저녁도 룸서비스 피자로 요기하고 되처 잤다. 이번 여행을 요양으로 끝내고 싶지 않은데, 몸이 말을 안 들었다. 밤바다의 기운을 받아 얼른 완충해야겠다.


푹 자고 나니 한결 컨디션이 나았다. 오늘은 향일암에 간다. 여수에 갈만한 곳을 물었을 때 친구가 추천한 곳이다. 단, 계단이 많다고 했다. 친구 말을 잘 들어야 했다. 계단이 입구부터 하늘 끝까지 뻗어 있었다. 평소 스쾃 백 개를 연속 소화하는 강철 허벅지를 가졌음에도 중간에 쉬어갈 수밖에 없었다. 무릎 보호대를 찬 엄마에게는 힘든 여정이었을 텐데, 항상 좋은 말만 하는 그녀는 불평 없이 언덕을 올랐다. 안 왔으면 크게 아쉬웠을 거라 했다. 하지만 친구들과 여수를 다시 오게 되면 한번 봤으니 여기는 안 와도 된다고 했다. 만족했지만 도로 안 올 거라니. 웃음이 터지자, 엄마도 따라 웃었다. 향일암 제일 끄트머리에 원효대사가 수행한 좌선대가 있다. 그곳에 서 있으면 과연 득도할 만큼 장관이 펼쳐졌다. 저 바다처럼 욕심부리지 말자.


두 번째 여행 코스는 케이블카다. 야경 크루즈와 케이블카 중 무엇을 탈지 고심하다 후자를 택했다. 유람선은 프랑스나 호주에서 여러 번 탔으나, 케이블카는 처음이었다. 밤에 돌아다니는 걸 안 좋아하는 엄마와 생리통 때문에 종일 밖에 있기도 힘든 내게도 최상의 답지였다. 잔뜩 흐린 하늘을 위에 두고 케이블카에 탑승하자, 들이치는 바람과 너울성 파도가 만들어내는 전율로 인해 흥이 났다. 《돌싱글즈》의 최종 선택 장면이 떠올라서 엄마에게 다음 여행은 각자의 애인과 가자고 제안했다. 엄마가 빵 터졌다. 기대수명이 백 세를 훌쩍 넘기므로 지금 만나도 40년 넘게 살아야 한다. 같이 살면서도 갈라서는 마당에, 40년은 살 수 있으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보다 엄마가 더 빨리 갈 것 같은 근거 없는 위기감이 느껴졌다. 분발하자.


여수의 묘미는 뭐니 해도 음식이다. 따로 찾지 않아도 문 열린 곳에 들어가면 다 맛있다. 메뉴만 선택하면 된다. 첫날은 갈치조림, 둘째 날은 간장게장, 셋째 날은 돼지갈비, 마지막은 보리밥이었다. 셋째 날까지 여수에서 유명한 요리를 모두 섭렵했다. 집으로 돌아갈 점심 무렵, 해산물은 피하고 싶었고 고기도 과하게 여겨졌다. 엄마가 좋아하는 보리밥집을 역 근처에서 검색했다. 엄마는 이날이 제일 맛있었다고 했다. 주요리가 보리밥임에도 반찬으로 수율과 고등어 한 마리까지 나왔다. 여백을 허용하지 않는 여수의 식탁을 찬양한다.


이번 여행에서 특이한 점은 방 예약에 사우나 입장권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호텔 수영장도 가지 않는데, 이미 낸 금액이라 한 번 정도는 체험해 보기로 했다. 두 달 전 강릉에서 붙은 살을 떨구기 위해 헬스장에서 땀을 흠뻑 흘리고 온탕에 몸을 담그니 근육의 긴장이 말끔히 사라졌다. 사우나가 내키지 않던 엄마도 물이 좋고 탕도 고급스럽다며 흡족해했다. 피부도 뽀송해졌단다. 다음 여행부터는 반드시 사우나 일정도 넣어야겠다. 맛있고 피로까지 풀어주는 여수는 완벽했다. 한 달이 지나서도 엄마에게 또 가고 싶지 않으냐고 물어보면 긍정적 답변으로 바로 호응한다. 남쪽에 있는 여수는 겨울에 가도 따뜻할 것이다. 보리밥 먹으러 재차 가야겠다. 동백꽃이 핀 여수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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