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발자 모드 속 일흔다섯 번째 이야기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쉬어본 지가 얼마 만인가. 긴 연휴 끄트머리에 놀러 가볼까 숙소를 검색했지만, 웬만한 곳은 다 찼다. 놀기도 부지런해야 가능하다. 투자도 여행도 부지런해야 간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온 앤 오프가 확실하다. 회사에서 모든 에너지를 쏟고 오면 집에서는 완전히 방전된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퇴근 후 운동까지는 잘 버텨낸다는 점이다. 이제 시작한 지 한 달 된 주짓수에서 관장님이 제법 잘 따라 한다고 했다. 그전에 했던 운동이 뭐냐고 묻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체육 부진아의 눈부신 성장이다.
체육인으로서 어젯밤부터 밀린 올림픽을 열심히 챙겨 보고 있다. 스노보드 하프파이프 경기의 최가온 선수가 공중에서 심하게 넘어지면서도 3라운드에 출전하는 장면을 볼 때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가 뛰어오르는 높이가 아파트 3, 4층에 달한단다. 딸을 존경한다는 아버지 인터뷰처럼 나도 그녀가 존경스러워졌다. 앞서 낙상하면서 다친 듯, 시상식에서 내려와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걷는 모습이 찡했다. 이채운 선수도 멋졌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다했음에도 세계의 벽을 실감했다는 그 말이 내 마음을 울렸다. 메달의 색상이 중요하지 않다는 캐스터의 말에서 진정성이 안 느껴졌으나, 그의 인터뷰는 달랐다. 최선을 다해서 경기를 마친 선수의 웃음은 감동 그 자체였다.
예전에는 금메달이 아니면 선수 본인은 물론 매스컴에서도 아쉬워했는데, 요즘은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동메달을 따도 세계 3위다. 전 세계 인구 82억 명 중에 무려 3등이다. 엄청나지 않은가. 과거에는 은메달보다는 동메달을 딴 선수의 만족감이 더 크다는 연구가 있었으나, 최근에는 그 차이가 줄어들었다는 보고도 있다. 스노보드 하프파이프의 클로이 김 선수가 시상식에서 보여줬던 환한 웃음과 차준환 선수가 1등 미하일 샤이도로프 선수에게 건네는 축하, 천 미터 경기를 마친 김길리 선수에게 잘했다고 활짝 웃는 최민정 선수가 훨씬 더 멋있었다. AI와 로봇이 만들어내지 못하는 감동이 올림픽에 분명히 있다. 모든 선수가 넘어지지 말고 후회 없는 경기를 펼쳤으면 좋겠다. 우리나라든 다른 나라든 넘어지면 그 선수의 꿈이 무너진 것처럼 마음이 아프다.
피겨스케이팅 경기에서 선수들이 엉덩방아를 찧는 장면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더 느리고 점수가 낮을 때 우승하는 경기가 있으면 어떨까. 새로운 규칙하에서 쇼트트랙은 느리게, 피겨스케이팅과 컬링은 저 득점으로, 스노보드는 느리고 낮게 뛰어야 이길 수 있다. 쇼트트랙은 느리게 걷기 위해 추월하지 않는다. 덕분에 넘어지는 선수도 없다. 피겨스케이팅은 감점을 쌓기 위해 점프에서 많이 넘어져야 한다. 새로운 규정을 고안해 낸 이유가 선수들의 넘어짐 방지인데, 피겨는 대치되는 상황이 와서 새 룰을 적용하면 안 되겠다. 컬링은 원안의 배점을 반대로 바꾸거나 원 밖으로 스톤을 쳐내면 승리할 수 있다. 새로운 규칙의 하이라이트는 스노보드다. 눈 위에서 최대한 낮게, 땅에 붙을 만큼 몸을 낮춰서 느릿느릿 걷는 선수가 금메달을 걸 수 있다. 이러면 올림픽 판도는 어떻게 바뀔까.
끈기는 충만한 내가 출전할 수 있는 올림픽 종목이 뭐가 있을까. 밀라노 코르티나 동계올림픽에는 16개의 종목이 있다. 최가온, 이채운 선수처럼 재능도 오기도 부족한 나는 운동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평소의 생활 패턴을 찾기로 했다. 요즘은 독서와 글쓰기가 지체되고 있다. 올 연휴 때는 어떡해서든 그 감각을 되살려봐야겠다. 사람은 자기 일이 있어야 느슨해지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데, 저 말은 백수가 아닌 사람들이 지어낸 자기 위로 아닐까. 아직 은퇴하기에는 여유자금이 부족해서 일해야 하는 나도 저 말에 강제 동감 중이다. 십 년 넘게 같은 목표로 회사에 다니고 있다. 이 정도면 ‘느린’ 올림픽에서 메달 수상도 가능해 보인다. 느릴수록 우승에 가까운 경기를 펼치고 있는 내게 문득, ‘빠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최가온 선수는 이제 무슨 목표를 가질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