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게리온
<End of Evangelion>
에반게리온에 대한 감상평을 적으려고 하면 막막하기만 했다. 분명 하고 싶은 말은 무지막지하게 많았으나 어디서부터 풀어내야 할지 전혀 감이 안 왔기 때문이다. 이미 논문도 존재하며 많은 담론이 오간 작품에 90년대를 겪지 않은 내가 말을 얹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쨌든 에반게리온을 제대로 보기 시작한 것은 올해 여름이다. 초반부의 내용은 '인간을 죽이려 하는 사도를 무찌른다'에 중점이 가있었고 개인적으로 전개가 루즈하다고 느껴졌기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이 만화가 단순한 메카닉 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나타난 이데올로기 특징 분석' 논문에서는 에반게리온에서 종교적, 심리적, 철학적 이데올로기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만큼 단 한 가지 이야기만 담겨있다고 보기 어려운 작품이다. 내 시선으로 본 에반게리온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 불완전한 인간의 실존, 메타 서사, 그리고 퀴어성이다.
1. 불완전한 인간의 실존
에반게리온에서는 끊임없이 인간은 타인을 이해할 수 없고 서로에게 상처를 입힐 수밖에 없지만 타인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혼자서 고유하게 존재할 수 없다. '나'가 존재한다는 것은 '타인'도 존재한다는 뜻이다. 인류보완계획은 개개인의 형체를 부숴 인류를 하나의 생명체로 거듭나게 한다. 그 세계에서는 상처도, 기아도, 불행도, 고통도 없다. 어찌 보면 이상적일 수도 있는 세계이지만 자신을 느낄 수 없게 된다면 죽은 것과 다름이 없다. 인류보완계획은 서드임펙트와 다름이 없다. 그러나 둘의 유일한 차이점은 인류보완계획이 실행되더라도 다시 한번 상처를 주고받는 불완전한 세계로 돌아오겠다는 의지가 있으면 다시 형체를 가지게 된다. 일관성 있게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줬던 신지는 결국 타인과 자신이 있는 세계로 돌아온다. 신지는 절대 이상적인 영웅 캐릭터가 아니다. 현실을 외면하는 유약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마지막에 황량한 바다 위에 떠 있는 신지와 아스카는 우리에게 더 큰 위로로 다가온다. 인류가 망해가고 있는 지점에서도 살아가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누구나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에반게리온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다. 어찌 보면 당연한 듯한 메시지를 품고 있는 에반게리온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이유는 인간은 여전히 타인과의 소통에 실패하고 자신의 존재에 위기감을 느끼며 괴로워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2. 메타 서사
신세기 에반게리온 25-26화는 불친절하기로 유명했기에 상당히 걱정을 하고 보았으나 전개의 난해함을 넘어서서 관객을 사로잡을만한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TVA 엔딩이 방송 사고라고 여기는 이들에게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 장면에 일상적인 모습, 즉 '지켜낸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전혀 게으른 연출이 아니다. 누군가는 이를 가능했던 세계를 보여준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가능할 것이라 믿지 않았으나 가능한 세계라고 정의 내리고 싶다. 비록 인류가 하나로 합쳐지고 있지만 그 실낱같은 가능성을 본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또한 이번에 개봉한 다카포를 보면서 확실해진 것은 에반게리온이 메타 서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겐도와 신지가 싸우는 곳이 세트장임을 암시하는 장면에서 확실해졌다. 26화에서도 신지는 각본을 짜는 감독처럼 보이는 장면이 있다. 왜일까? 왜 메카닉 물에서 갑자기 메타 서사가 되는 것일까? 여기서 창작물 만들기의 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창작물에는 창작자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자신의 사상과 경험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노골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창작자도 존재한다.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의 결과물로써 간접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트라우마와 상처를 다시 마주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데이빗 린치의 <인랜드 엠파이어>를 가져와서 이야기해보자면, 니키라는 인물은 영화 속 인물을 연기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결국 과거의 인물과 접촉하여 일종의 치유를 경험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얘기해보자면, 에반게리온을 메타 서사로 보자면 신지 자신의 트라우마를 이야기로 재구성하여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3. 퀴어성
90년대에 만들어진 작품 치고는 퀴어 코드가 여기저기 나타나 있다. 마야와 마리의 짝사랑, 그리고 카오루와 신지의 관계.. 여기서 카오루는 신이기 때문에 동성애로 볼 수 없다는 의견에 대한 반론을 하고 싶다. 앞서 말했듯 다양한 해석이 쏟아지는 에반게리온이기 때문에 카오루와 신지의 관계를 유약한 인간에게 기회를 준 신으로 해석해도 문제가 될 건 없다. 하지만 그런 상징성을 소년과 소년의 모습으로, 그러니까 동성애적 형태로 나타낸 것 또한 사실이다. 2021년까지 이런 담론을 하고 있어야 한다니. 또한 특정 인물들 간의 관계에서 퀴어적인 무언가가 그려지는 것을 넘어서서, 인물들의 특징에서 발현되는 퀴어성에 대해 말하고 싶다. 에반게리온에 나오는 인물들은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 흔히 말해 '정상적이다'라고 표현되는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 정상성 수행에 실패한 사람들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 퀴어성과 맞닿아있다. 물론 현재 21세기에서 창작자는 퀴어를 단지 불행하고 사회에서 튕겨나간 존재들로 그리는 게으른 짓을 저질러서는 안 되지만, 20년 전 작품임을 감안할 때 충분히 그렇게 볼 여지가 있다.
에반게리온은 이제 다카포로 막을 내렸지만 그것이 주는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은 언제까지나 불완전할 것이며 지구와 달과 태양이 존재할 때까지 엎치락뒤치락할 것이다. 공생에 정착하는 과정이 길고 고통스러울 것이지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나와 타인이 있는 세계에 안식이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무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