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다들 고양이나 돼버려라.
사람답게 살지 못할 바에야.
저는 지금 구름 위에 있습니다. 제주도를 가는 중이거든요. 사실 요즘 같은 시국(이 글을 쓰던 당시는 2021년 봄, 코로나가 극성일 때였다)에 제주도 여행을 달갑지 않게 보시는 분들도 많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충분히 맞고요. 하지만 코로나19가 거의 2년째 길어지고 있는 지금, 가끔의 자유는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또 이렇게 티켓값이 쌀 때 아니면 언제 제주도를 가보겠냐는 마음도 있고요. 비록 여행 가는 이틀의 절반은 비가 주야장천 내리는 태풍 시즌이지만! 설레네요. 제주도라는 장소가 주는 기분도 있겠지만, 비행기라는 더 큰 설렘 때문인 것 같습니다.
늘 비행기를 타보고 싶었습니다. 앉아서 바라보는 하늘은 어떤 냄새일까 궁금했었거든요. 지금 와서 보니 여유로운 출근 전, 카페에 들러 손에 든 아메리카노 한 잔의 향긋한 내음이네요.(비현실적이라는 말이죠) 높은 고도에서 구름을 내려다보는 일은 생각보다도 더 신나는 일입니다. 비행기 창문을 더 튼튼한 소재를 이용해 더 넓게 만들어주면 참 좋을 텐데. 저 넓은 하늘을 요 코딱지만 한 창문으로 보고 있자니 답답합니다. 아, 답답한 게 창문 때문만은 아니었군요. 기압 차이 때문에 양쪽 귀가 모두 먹먹해져 있었습니다.
높은 고도를 달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삼킨 침 한 모금이 시원한 자극을 줍니다. 한 번 침을 삼키기 전까지는 내 귀가 먹먹한 줄 모르고 있다가, 그 후로는 의식적으로 마른침을 삼키게 됩니다. 아무 감정도 없던 것이 괜스레 답답함을 주고, 조바심을 느끼게 하네요. 뱉지 못하고 속으로 삼켰던 말들보다 더 비좁은 듯한 이 달팽이관의 호소가 참 신경 쓰이는 특이한 순간. 평소 삶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알기 전에는 신경 쓰이지 않던 것들. 의식하게 된 후에는 수시로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들. 어떠한 의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삼킨 침 한 모금에 그리된 것들이, 듣고 싶어 들은 것도 아니고 보고 싶어 본 것도 아닌 일들이. 모르는 새 귀에 감긴 것들이. 어쩌면 우리의 생각이 아니었을 것들이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생각은 이미 그곳으로 쏠려 있지요.
요즘의 사람들은 자극에 굶주려 있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유명한 누군가가 이러이러한 잘못을 했다더라. 걔랑 걔가 이렇고 저렇고 했다더라. 이런 누군가의 한마디만 있으면, 평소에 관심도 없던 사람에게 삼삼오오 모여들어 비난과 혐오 섞인 시선을 쏘아붙이는. 물론, 진짜로 그 사람들이 잘못을 했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상황입니다만, 그렇다고 해도 과연 그 사과와 벌을 화면 너머의 우리들이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라 생각하지 만서도, 무엇보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잘못이 없는 사람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 피해를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정보의 양이 넘쳐나고 공유가 빨라진 네트워크 사회에서 어떤 '하나'에 대한 이야기는 전달하기도, 만들어내기도 쉬운 것이 되었습니다. 익명성이 보장된 온라인 문화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욕하고 비판하기에 용이한 힘을 가졌습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도태되지 않기 위해 경쟁하고, 승리해야 하는 구조에서 상처입은 우리 내면에 알게 모르게 분노가 쌓입니다. 이 3가지가 중첩되어 나타난 요즘의 유행이, 혐오와 비난이라는 트렌드입니다.
흡사 중세시대의 마녀사냥을 떠올리게 하는 이러한 "유행"은, 이제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관심이 없던 사람들마저도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시류에 편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중독적인 유행가처럼 말이죠. 평소라면 별생각 없이 넘어갔을 법한 일도, 그 사람이 그 일로 되게 욕을 먹고 있다더라, 라는 한마디에 엄청난 잘못처럼 느껴져 그 트렌드를 따라가게 되는. 생각해보면 옛날에도 유튜버들은 광고 협찬을 많이 받았을 거고 알게 모르게 우린 그걸 인지하고 있었을 텐데. 생각해보면 사실 저 음성 상징어는, 저 손 모양은 그런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 텐데. 생각해보면 내가 조금만 참고 양보했으면, 우리가 서로에게 아주 조금의 존중을 갖고 임했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었을 만한 문제였는데. 떠올려보면 저 방송의 저 연예인은 원래부터 그런 캐릭터였는데. 조금만 생각해봐도 저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확실한 근거도 없는, 추측과 온갖 소문이 섞인 것들일 뿐인데, 말이죠.
피가 묻어 나오는 유행에서 한걸음 떨어져 잠시만 집중해봐도 떠올릴 수 있는 생각들인데, 그 한걸음 떨어지는 것이 요즈음에는 굉장히 힘든가 봅니다. 이 트렌드에 익숙해지다 보니, 자연스레 사람들은 자극에 길들여진 듯합니다. 마치 이게 당연한 일인 듯 양, "야 당연히 그건 잘못된 거지! 너도 똑같은 놈이구나?" 라며 반대의견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과 배척이 팽배해진 오늘의 사회를 과연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기술은 발전되고 생활환경도 좋아지는데, 모순적이게도 세상은 점점 살기 힘든 곳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합심해 누군가를 까내리고, 누군가를 까내리는 그들을 다시 비난하고, 다시 그들과 이들의 싸움으로 번져나가는 우리 내의 "대세"가 모두를 날 서있게 만드는 건 아닐까요. 언제부터인가 우리 모두가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조심하게 된 것이 이러한 이유에서 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커뮤니티, 유튜브, 웹툰, 블로그, 카페,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뉴스, 심지어는 출근하는 버스와 지하철에서도 누군가는 꼭 싸우고 있습니다. 싸움의 이유를 들어보면, 충분히 갈등이 일어날 만한 언행을 누군가 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문제는, 누가 그 사람을 가해자로 만들었을까입니다. 원래부터 사람에 대한 존중이 없이 태어난 걸까요? 애초에 말을 시비조로 밖에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을거냐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갈등은 본인의 생각에 깊게 빠진 누군가의 언행으로 시작합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저런 아무것도 아닌 게 날 기분 나쁘게 했으니 화내는 건 당연하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저 사람의 태도와 행동은 사회적으로 매장당해야 마땅하다. 나보다 못 배운 티를 내는 놈들은 무시해도 괜찮다. 내 생각에 이건 저 사람이 천하에 둘도 없는 나쁜 놈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다. 이런 스스로의 틀에 갇힌 생각들이 존중 없고 신중하지 못한 언행을 낳습니다.
극심한 자기중심적인 생각은 주로 외부 공격에 대한 방어기제로 쌓이게 된다라고 심리학에서는 설명합니다. 본인이 공격을 당했던 기억이나, 다른 사람이 그런 식으로 공격을 당하는 걸 목격한 어떤 이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낳은 공포와 이를 막아야 한다는 자기 의심 없는 사명과 정의가 축적된다는 것이죠. 내가 물어뜯기기 전에 너를 짓밟아야 하니까, 그런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선 내 생각이 옳다는, 합당한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다는 겁니다. 슬프게도, 지금 우리는 이로 인한 혐오와 불편의 시대에 살고 있다 느껴집니다.
방어기제의 핵심적인 원인인 두려움. 두려움을 유발하게 한 것은 아마도, 본인이 아닌 누군가의 극적인 감정이 물살을 타고 전해져 왔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모든 공포를 본인이 직접 겪기는 힘들 테니까 말이죠. 또는 누군가의 혐오와 불편이 직접적으로 전달되었을 수도 있겠네요. 자기의 생각이 아닌데도 우리는 이에 쉽게 휩쓸리고 마는 것이고, 그래서 조금만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논리적이지 못한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설득당하는 것이죠. 이미 화가 날대로 난 주변인의 면전에 '그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요. 나의 불편이 아니었던 것은 어느새 나의 불안과 짜증으로 번져 있습니다. 그렇게 화가 서로를 향해 불처럼 피어 나가 현재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의식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먹먹해진 귀가, 어느새 우리의 온 신경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다시 비행기로 돌아와, 제 앞자리의 아기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희한한 귀의 감각에 울음을 터뜨립니다. 어쩌면 저것이 사람다운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원래 내 것이 아니었던 마음에, 원해서 듣고 본 것이 아니었던 감정들에 익숙해지고 함께 불편해하는 것보다, 누군가의 공포와 혐오 섞인 말들에 동조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당신들이 더 무섭다며 울고 마는 것이. 더욱 '산 사람'이 아닐까, 하고요. 본래 사람은 외부에서 유입되는 것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고 태어난다 하는데, 그러면 저 아기처럼 낯선 감정과 감각에도 울음을 터뜨리는 게 인간답지 않을까요. 우리 모두가 다시 인간다워진다면, 이 혐오와 불편으로 가득 찬 사회를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도 꿈 꿔 봅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제 앞에 앉아계신 아이의 가족, 우는 아이를 품에 안고 달래는 저 가족같은 존재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건 아닐까요. 모두 무언가에게 쫓기듯이 조심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인 우리에게, 포근하게 안아주는 어떤 이의 부재가 만든 아픈 삶을 버텨내는 우리에게 말이죠. 단순히 혈연으로 엮인 관계가 아니라, 진심으로 우리를 이해하고 포용해 줄 수 있는 가족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그러면 낯선 감정들에 겁을 먹은 우리가 품에 안겨 아기처럼, 마치 사람처럼 마음 놓고 울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서로가 서로의 가족이 되어줄 순 없을까요. 서로에게 조금의 존중과 배려를 나누어주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나의 적이라고 생각하기보단, 힘을 합쳐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는 동료라고 생각할 순 없을까요. 반대를 위한 반대와, 혐오를 위한 혐오에서 벗어나 상호 간에 아주 자그마한 이해심만 있어도 충분히 가족이라고 부를 만한 공동체가 되지 않을까요.
물론, 제 생각이 너무나도 유토피아적인 것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이 되고 가족이 되기엔 이미 너무 먼 길을 걸어온 이후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진 사람에 대한 마음은 사실 싫증이 대부분이고요. 그럼에도 왜 이런 글을 적고 여러분에게 호소 아닌 호소를 하고 있는 이유는, 희망 하나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누군가는 미래를 심어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헛된 꿈일지라도, 꿈은 그저 존재한다는 것 만으로도 빛나는 별이니까요. 모두가 방향성을 잃고 서로를 노려보는 유행길 앞에 과속 방지턱이라도 깔려면 허공에 떠서 빛을 내며 이목이라도 끌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에도 아기와 아기의 보호자에게 호통치며 짜증 내는 "트렌드 리더" 가 계시지만, 누군가는 제 지루하고 긴 글을 읽고 유행에 뒤쳐지고 싶어 하시지 않을까 하는 바람입니다.
인간에 대한 기대가 없다는 제 내면도, 더 이상 희망이 생기지 않는 상태란 건 아니니까요. 미우나 고우나, 어쨌든 또 하루를 살아가야 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답답하고, 비통해서, 길게 한 번 적어보았습니다.
사람이길 포기했다면 차라리 고양이로 변하면 좋을 텐데. 고양이는 가만히 있으면 귀엽고 예쁘게 느껴지라도 하거든요. 비록 싸가지없고 냥아치적인 폭력배가 다수인 종족이지만, 그건 이미 유행을 거부하길 포기한 저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으니까 말이죠. 어차피 그럴 거라면 다들 고양이로 진화했으면 합니다. 한 집에 두 가구 정도는 들어살 수도 있으니 집값 문제도 해결되겠네요. 그럼 고양이 세상에서 그들이 드나드는 산장의 그루비한 주인인 저는 권력자가 되겠군요. 크하하하. 열정적으로 보살펴 주마.(뭐라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