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제일 가는 호구가 되고 싶다.
라이크 어 무소유
나는 어머니에게 늘 얌생이 같지 못하다고 혼이 난다. 사람이 좀 제 몫을 챙기려고 싸울 줄도 알아야 하는데, 나는 항상 지고 온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나는 누군가와 싸움이 나려 할 때면 먼저 지려고 한다. 가능하면 싸움을 피한다. 그럼으로 인해서 내 것을 좀 잃게 된다고 하여도, 바보같이 양보하고 배려하는 사람이 된다 하여도, 그래서 사람들에게 호구라고 낙인이 찍힌다고 하여도 말이다.
난 스스로가 큰 것을 원하게 하지 않는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적당히 알맞게 먹었으면 충분히 만족하고 친구들에게 넘길 수 있다. 자신에게 높은 목표를 부여하지 않는다. 학생 시절 입시를 위해 거대한 꿈과 싸우면서 얻은 흉터들은 여전히 나를 수시로 옥죄는 깊은 후유증을 남겼지만, 그것 말고도 나에게 남긴 것이 있다. 배부른 청년이 되는 법. 사소한 것에도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법. 가야 할 때를 알고 실제로 행동에 옮길 수 있는 법을 말이다.
물론 흉이 흉인 줄 모르고 살았던 시절엔 나도 호구처럼 살진 않았다. 대학 입시 때의 나는 SKY권 대학에 가야 한다는 높은 꿈에 짓눌려 살았다. 스스로의 목표에 붙잡혔고, 부모님의 기대에 억눌려 살았다. 행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도 내 속이 썩고 있음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난 친구들이 있었고, 남들이 보기엔 전혀 문제없는 학교 생활을 하고 있는 평범한 아이였다. 당시에 나는 남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신념에 병적으로 집착했다.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하는 것이 그들에겐 알고 싶지 않았던 얘기를 듣게 되는 일이라 생각했었다. 자기혐오와 자학의 정신으로 살았기에 모든 우울과 고통은 내면에서 돌고 돌 뿐이었다.
아픈 마음은 열아홉 수능을 망치고 재수를 하게 된 스무 살까지도 이어졌다. 아니, 더 심해졌다. 마음은 신체와 정신을 병들게 했다. 당연히 성적이 더 떨어졌고, 그러면 또 자신을 혐오하며 더욱 아파지는 악순환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니던 학원의 계단을 오르다가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그 날은 뒷목이 너무 뻐근해서 계단을 올라갈 때 목을 젖히고 걸어보려 했다. 목의 시원함과는 별개로, 큰 두려움이 나를 멈추었다. 매일 서른 번도 넘게 오르내리던 계단인데, 한 층에 계단이 몇 개 있는지도 외우고 있는 바로 그 곳이었는데, 한 발짝도 내딛기 힘든 무서움이었다. 이번엔 고개를 숙이지 않고 계단의 맨 위쪽 단을 바라보며 걸어보았다. 역시 공포 그 자체였다. 우습지 않은가. 쉬는 시간마다 잠 깨려고 두 세 단씩 뛰어다니던 나인데, 고작 내딛을 바로 앞의 한 단을 보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리 두려움에 떨다니. 문득 나는 우리의 삶도 이와 같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계단을 오르내릴 때 발 밑을 시야에 두고 걸어야 함을 안다. 그래야 심리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배우지 않았으나 알고 있다. 아무리 경사가 낮은 계단이라 한들, 금방이면 닿을 거리라는 사실 따위는 큰 상관이 없다. 우리는 그래야만 공포에 떨지 않을 수 있다. 목표하는 곳이 아니라 발 밑을, 바로 다음 발걸음에 내딛을 한 칸 앞을, 가장 가까운 곳을 바라보는 것. 그 시선이 주는 편안함은 무척 크다.
살아갈 때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무릇 꿈과 목표에 대해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꿈을 높게 가져라”, “자신의 기대보다 높은 목표치를 설정해야 그 절반이라도 갈 수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목표는 높게 가질 수 있고, 그것이 주는 이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노력해서 발전했음에도 자신이 원하는 목표치까지는 가지 못했기에, 끊임없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도록 유도하는 작용을 높은 꿈이 해주기 때문이다. 아마도 어른들은 아이들이 자신들의 미래 모습으로 고작 공무원, 벼락 부자, 코인 대박 등을 원하는 현실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 아닐까 싶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높은 꿈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앞을 보며 살아가는 자세라고 나는 생각한다. 언제나 시선이 가장 먼 곳을 향해 있는 삶은 늘 하루하루가 불만족이고 두려움일 것이다. “또 실패했어. 나는 왜 이것밖에 못하지.” 라며 자신의 높은 기대치에 스스로를 비교하고, 힐난하게 될 것이다. 저 높은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나는 무얼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라는 두려움에 불안할 것이다. 물론 이것이 자기 자신을 채찍질해 뜀박질을 더욱 가열차게 한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 진심으로 그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나는 마음이 그 정도로 강인한 사람이 아니어서, 스스로에 대한 비난과 채찍질이 너무나도 아프다. 그래서 자꾸만 쓰러지고 싶은 약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나는, 큰 꿈을 꾸며 살라는 이들에게 감히 고개를 들고 반박하고 싶다. ‘굳이 그렇게까지 살아야 할까?’라고.
사람은 단순한 동물이다. 욕구도 많고,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갖는 희열은 온 마음을 뒤흔들 정도로 지배적인 것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인류의 정신으로 산다는 것은, 말 그대로 살아가는 것과 같아서 틈틈이 달콤한 식사를 먹어줘야 한다. 그래야 에너지를 얻고 더 힘을 낼 수 있다.
그러나 가고자 하는 곳 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맛있는 걸 먹기 어렵다. 당장에 이룰 수 없는 목표에 끊임없이 자신을 비교하는 이의 음식은 쓰고 떫다.
언제나 시선이 가장 가까운 곳을 향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낮은 하루하루의 골대가 우리의 금쪽이 마음을 밥 먹여줄 것이다. 그래서 기운 차리고 내일을 더욱 힘차게 시작할 수 있도록 말이다.
궁극적인 지향점 자체를 낮추라는 게 아니다. 단지 그 지향을 조각조각 나누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 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목표를 썰어 두라는 얘기다. 100점을 받고 싶다면 일단은 20점, 그 다음엔 30점. 차근차근 간식을 먹어가며 마침내 100점에 도달하는 것이다.
사실 거기서 거기인, 사소하다고도 느낄 수 있을 변화다. 그저 이 사소함이 주는 추가적인 열량(熱量)은 전혀 사소하지 않을 뿐이다.
달리기 위해 오늘도 스스로를 옥죄어야 한다는, 좀 더 노력해야 한다는 출처 모를 의무감에 짓눌린 사람들에게 나는 큰소리로 말하고 싶다. “감히 말하건대, 달게 사세요. 살 찌우면서 사세요.” 다이어트는 내 몸이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안 그래도 힘든 식단 조절을 내 마음까지 시켜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 살이 찌자. 배부른 인간이 되자. 사소한 것에도 감사할 줄 알고, 행복할 줄을 알자. 나 또한 그렇게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 호구가 되자.
작은 것에도 배부를 줄 아는 사람은 호구가 될 수 있다. 자신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말아보자. 맛있는 음식을 더 많이 먹고 싶어하지 말아보자. 행복하기 위해 참아보자. 참는 것이, 남에게 내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 세상 물정 모르는 호구라 여겨지는 세상에서 ‘나의 꿈은 호구다!!’ 라고 당당히 말해보자. 나는 행복하기 위해 화를 참고, 양보하며, 이해하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그래서 결국엔 까먹어버린다.
찡그리는 일들보다 웃는 날들이 많길 바라는 따뜻한 마음으로, 내 작은 것들을 소중히 모아서 당신께, 내 소중한 당신들께 나누어 주도록 해보자. 그래서 그들이 기쁘다면, 그것에도 배부를 줄 아는 사람이 되어보자.
당신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자. 타인의 생각을 완벽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지만, 그러니까 최대한 양보하려 하자. 나에게 있어 행복은, ‘사소한 곳에서 오는 것’이다.
매일의 사소한 곳들에 웃음을 심어 두자. 아버지의 구두 밑창에, 어머니의 부엌 한 켠에, 형의 책상 서랍 구석에, 연인의 예쁜 보조개 속에, 온갖 소소한 것들의 뒤편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숨겨 두자. 행복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자.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소개하기엔 창피할 정도로, 그들이 사소한 것들이게 하자.
그럼 그 사소한 것이, 당신을 살아가게 해줄 것이다.
그 작음 덕분에 나는 아직 살아남아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나는 호구이기에 살아있고, 호구일 것이기에 살아 남을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가는 호구가 되어서 힘든 시대에 웃음이 많은 삶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