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이 떨어지고, 영상으로 이어지던 따뜻한 날씨도 계절의 변화를 읽듯 서서히 차가워져 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한 직장에서 함께 근무했던 네 친구는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가져왔다. 그러나 지난여름, 그중 한 친구가 세상을 떠나 셋이서만 만나오다가, 공직에서 퇴직한 또 다른 친구를 불러 다시 넷이 모이게 되었다.
저물어 가는 한 해, 우리는 퇴직 후 텃밭 농사와 양봉을 하며 소일하고 있다. 연말이 다가오니 그냥 넘길 수는 없다. 친구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새해가 오기 전, 12월 끝자락에 날을 잡아 송년회를 하기로 했다.
반가운 친구들을 만나니 식사도 하고 차도 마셔야 한다. 복잡한 시내 식당이나 커피숍보다는 우리만의 오붓한 공간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계도 벽도 허물도 없이, 옛 시절로 돌아가 밤새 웃고 이야기하다가 잠시 잠들 수 있는 곳. 그렇게 하룻밤의 만남으로 한 해 동안 쌓인 삶의 작은 무게들을 덮고 싶었다.
큰 도로를 벗어나 자동차로 이차선 아스팔트길을 조금 달리면 인적 드문 산길 오르막이 나타난다. 간간이 차들이 지나가긴 하지만 눈에 띄지 않고 그냥 스쳐 지나가기 쉬운 길이다.
오르는 시멘트 포장길에는 제법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고, 길 양옆에는 주인이 어린 시절 고향의 추억을 떠올리며 심었을 법한 영산홍과 개나리가 큰 무리를 이루고 있다. 영산홍 군락이 끝나는 지점에는 키 작은 고목을 감싸 안은 능소화가 잎과 줄기를 내밀며 이곳을 찾는 이를 반기듯 서 있다. 꽃이 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얀 모시 적삼에 중절모를 쓴 황톳빛 얼굴의 노신사가 꽃에 젖어 고개를 들고 한없이 능소화를 바라보는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꽃이다. 한 동안 발길을 멈추고 푸른 창공과 이어진 능소화를 바라보면 누구나 환한 미소를 짓게 될 것이다.
이 오르막길 끝에는 이곳이 사유지임을 알리는 철문이 있다. 석양이 비치는 그곳에서 높이 뻗은 향나무와 백송을 마주하고 시멘트 차도를 지나면, 새소리와 산능선 위 높푸른 하늘에 흩어진 옅은 흰 구름과 어우러진 겨울산이 조용하고 한적하게 펼쳐진다. 목조 가옥이 있는 이곳이 송년회 장소다.
저녁 메뉴는 돼지머리 고기다. 친구는 시장에서 사 온 돼지머리를 한약재와 함께 장작불 가마솥에 넣어 족발 모양이 나도록 푹 삶아왔다. 텃밭에서 겨울 입맛을 돋우려 남겨둔 납작한 배추도 몇 포기 뽑아왔다. 눈밭의 추위를 이기고 자란 듯, 아이 손바닥만 한 크기에 두툼하고 가장자리가 거칠고 누렇게 물든 치레기 배추다.
머리고기는 마치 셰프의 손길을 거친 듯 도마 위에 올려졌고, 남정네가 칼로 두툼하게 썰어 한 접시 가득 담았다. 집된장과 아내가 담근 배추김치 한 그릇을 곁들여 상에 올렸다.
몸을 녹이듯, 삶의 무게를 풀어내듯 맥주를 마시며 학창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할 말이 어찌 그리 많은지 늦은 밤이 되어도 한 사람의 이야기가 끝날 줄 모른다. 못다 한 이야기를 다 하려면 며칠이 걸려도 모자랄 듯했다. 붉어진 얼굴, 때로는 자지러지는 웃음, 기분 좋은 만남에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며 몸을 흔들기도 한다. 희어진 머리를 마주한 채 기억 속에 묻혀 있던 학창 시절의 장면들이 다시 살아나, 모두가 그 시절 한가운데에 서 있는 듯하다. 그렇게 밤을 지새우며 송년회를 보냈다.
우리는 이제 학창 시절의 강을 건너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 와 있다. 흐르는 강물에 돌이 모서리를 잃고 둥글고 매끈해지듯, 우리의 삶도 그렇게 다듬어져 왔다. 등잔불 아래서 감자를 먹던 가난한 농부들처럼, 민낯으로 마주 앉아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송년 모임을 마치고 다시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는 길 깜깜한 밤, 산길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모습은 다시 학창 시절 따뜻한 추억을 지나 지금까지 살아온 거친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 같았다. 마치 터널을 지나 또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듯하다.
또다시 이런 송년 모임을 할 수 있기를, 조용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