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의 나는 권선징악을 맹신했다. 타인을 다치게 하거나, 속인 사람은 지엄한 법의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학교폭력을 당하는 친구를 위해 나섰다가 학폭위(학교 폭력 위원회)가 열리고, 퇴학은 커녕 교사에게 '그래도 상대방이 뉘우치니 다행이지 않냐'라는 말을 들어야 했을 때 그 믿음을 반쯤은 깨져 버렸다. 그래도 매일매일 학대를 당하면서도 언제 꺼질 줄 모르는 숨을 간신히 붙들고 있는 나에게 징벌의 믿음을 버리는 건 무척이나 요원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쉼터에서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사건으로 그 믿음을 완전히 버리게 되었다.
요한 형이 입소할 당시, 나는 부친을 고소하기 위해 불철주야 발품을 팔고 있었다. 학창 시절의 주위 친구들은 그래도 정상적인 가정을 갖고 있고, 학대를 피해서 이런 보호 센터로 흘러오지도 않는데, 나만 이런 삶을 영위해야 하는 게 눈물이 날 정도로 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라면 나를 도와 부친을 징계하는 데에 앞장 서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내 모습을 본 쉼터 친구가 이렇게 조언했다. ‘경찰 개무능하니까 기대하지 마.’ 그냥 무능한 것도 아니고 개무능하다니! 당시의 나는 친구의 뼈 있는 말을 흘려들었다. 솔직히 막연히 잘 될 줄 알았다. 당연히 어머니도 내가 아버지를 고소하는 걸 도와주리라 생각했고, 세상에 정의라는 게 있다면 하늘에서 벼락이 내려 부친을 불태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절망적인 현실만 알 뿐이었다. 가정폭력은 증거가 남지 않는 만큼, 고소가 쉽지 않다는 경찰관의 안내가 있었다. 경찰관이 더없이 인간적인 태도로 물었다. “어렸을 때 쓴 일기 있으세요?” 어렸을 적부터 작성한 일기는 중요한 증거 자료로 사용될 수 있다고 한다. 이건 내 잘못이다. 미리 가정폭력을 당할 것을 예상하고 철저하게 일기를 작성했었어야 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는 일기를 쓰는 대신 눈물로 배게를 적시며 잠들기 일쑤였고, 동생을 달래야만 했으니까. 일기를 쓸 시간 따위는 없었다. 만약 주위에 어린아이가 있다면 조언해라, 일기를 미리미리 작성해 놓는 편이 나중에 고소할 때 도움이 된다고.
내 첫 고소는 좌절되었지만, 이를 용납하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어머니를 설득해 경찰서로 데려갔다. 하지만 어머니는 증언에 소극적이었다. 다시 한 번 실패했다. 증거가 없으니 당연한 이유였다. 어머니는 내가 이혼을 요구했을 때 거절했다. 본인의 인생을 내가 결정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어머니에게는 부동산 투자 실패로 인한 빚이 있었다. 내가 속했던 가정은 집이 없었다. 그래서 집 한 채를 마련하는 게 꿈이었다. 어머니는 집을 구하기 위해 협동조합에 가입해 아직 완공되지도 않은 아파트를 분양받으려 했다가 공사가 끝없이 연기되면서 빚을 지게 되었다. 어머니는 이 일을 도무지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공무원 연금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자신은 퇴직 후에도 마트 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다고 넌지시 말하면서 말이다.
부모의 인생을 자식이 결정할 수 없다니? 그럼 부모로 인해 결정된 자식의 인생은 누가 보상해준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보답받을 수 있단 말인가? 실제로 나는 초등학교 시절, 부모에 대한 욕을 일기에 썼다가 한 차례 크게 혼난 적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자식은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이 당연했으니까 그러려니 한다.
역시난 부친은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거절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의도적으로 부친 주변 사람들에게 소문을 내려했다. 공무원이었던 부친인 만큼 평판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최악일 테니까. 그리고 부친의 혈육에게도 소문을 내려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부친을 죽일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다는 사실만 확인할 뿐이었다. 그렇게 자존심 강하던 부친은 죽지도 않고 꾸역꾸역 살아갔다. 분명 회사 내에서도 소문이 다 퍼졌을 텐데도, 살아있었다.
부친은 평소에 자기 친구들에게 모친 사고 친 빚으로 고생을 하고 있다고 하소연을 했다. 하지만 그들도 몰랐겠지. 부친이 가정 폭력범이었다는 것을. 그렇게 뻔뻔하게 타인을 속일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어쩌면 부친은 정말로 자신이 피해자라고 믿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쉼터생들은 나를 위로하지도 않고, 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묻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도 일이 이렇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나는 그들의 침묵 속에서 우리를 연결 짓는 커다란 공통점을 발견했다. 우리 중 누구도 죗값을 받아낸 적이 없었다.
경찰 조사를 마치고 난생 처음으로 쉼터 동갑내기와 다퉜다. 그 친구는 평소 나에게 불만을 갖고 있던 친구였는데, 당시 우울했던 나와 별 것 아닌 이유로 말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식당에서의 말싸움은 1시간이 넘도록 진행되었고, 선생님께서 식당으로 들어와 무언의 눈치를 주고 나서야 멈췄다. 하지만 쉼터 선생님들은 나의 이런 행동에 대해서 불문율에 붙였다. 왜냐하면 선생님들도 내가 경찰서에 방문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평소와 다른 나의 행동을 이해해준 것이 아닌가 싶다.
많은 나이 드신 어른들을 만나다보면, 우스갯 소리로 과거에 허용되었던 처벌들이 지금은 허용되지 않는데, 이게 상당히 묘한 감각을 준다고 했다. 아이가 보는 앞에서 부부 싸움을 해도 아동학대라고 설명하시는 여성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왜 나는 더 늦게 태어나지 못했던 것인가'라고 생각했던 바를 회고해본다. 아니 어쩌면 아예 태어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니 나는 이제껏 단 한 차례도, 정의를 구현해본 적이 없었다. 고교 시절에는 폭력을 행사당하는 학우를 돕다가 목을 뜯겼다. 그리고 모친과 부친은 이 일을 크게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학교 교사들은 이 일을 덮고 싶어 했고, 학교 폭력 위원회에서는 내가 그 학생을 자극해서 문제가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는 소문을 전해들었다. 나는 ‘내신’을 생각하라는 모친의 말에 굴복했고, 교사와 맞서 싸우려는 생각을 접었다.
나중에 모교 고등학교가 한 차례 화재가 된 적이 있었다. 학교회장이 한 학생을 주도면밀하게 괴롭혀 자살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내가 직접 방문한 고등학교에는 동문 국회의원이 선출되었다는 플랜 카드가 적혀 있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동안 학교에서는 무엇을 했던 것일까? 방치? 방관?
간혹 생각한다. 내가 그 때 부모님의 말을 듣지 않고, 학교와 맞서 싸웠다면 자살했던 아이는 살아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 어머니의 도움이 없다고 포기하지 않고, 아버지를 더욱 더 괴롭혔다면 더 나은 성과를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