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꿈은 유복한 자들만의 전유물이라고 확신해왔다. 사람들의 시야는 대부분 자기가 일생을 살아오는 과정 속에서 형성된다. 그리고 그 환경은 누군가에게는 풍족할 수도, 또 누군가에게는 빈곤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이 갖는 꿈이란 결국 환경에서 무엇을 보고 볼 수 있느냐에 좌지우지 된다고 여긴다. 의사나 변호사가 부모인 자식들이 자연스럽게 전문직을 꿈꾸는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는 우스갯소리로 말한다. 어떤 사람이 음악가를 꿈꾸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주위에 음악가가 있는 것이라고.
게다가 난 꿈을 위해 노력하는 것조차 박탈당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노력이 배신하고, 목표에 다다르지 못하는 그런 억압적인 환경 속에서 자란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환경이라면 학업에 충실하지 못할 터였고, 정서적으로 불안전하다면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잠재성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한다고 여겼다. 공부와 적성 개발에만 집중할 수 있는 아이들을 절대로 이길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언제나 스스로의 한계선을 그었다. 그래서 불우한 아이들은 평범한 아이들과 경쟁하는 걸 포기할 거라고 여겼다. 결코 청소년 쉼터에서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하는 쉼터생들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치는 못했다.
쉼터생들은 많이 무기력하다. 자신이 아닌 타의에 의해 결정된 환경들에 휩쓸렸다는 피해의식을 공유하고 있기에 미래지향적으로 사는 이들은 극소수다. 그리고 이는 나 또한 마찬가지로. 몸도 아프고, 마음도 정신적으로 아프니 도무지 무언가를 노력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허리 디스크를 핑계로 일자리를 구하지 않았고, 대학교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 여기지 않고 자기 개발을 뒷전으로 미뤘다.
조그마한 도전 의식과 희망이 있었다면 한국 장학 재단의 등록금 대출과 생활비 대출, 그리고 대학교에 양해를 구해 근장을 하는 것으로 학교 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그런 제도가 있는 줄도 몰랐다. 알았다면 그 고생을 안 했을 텐데. 지금도 정말로 아쉽다.
하지만 그럴 때 나의 길잡이가 되어준 쉼터생들이 있었다. 멘토라고 하기에는 낯 부끄럽고, 정신을 번쩍 차릴 수 있도록 돕는 망치 같은 인간들이었다.
추운 겨울날, 청소년 쉼터에 범상치 않은 인간이 찾아왔다. 제법 통통한 체형에 둥그런 안경을 쓰고 있던 요한이 형. 요한 형은 청소년 쉼터에 입소하자마자 쉼터 구석에 박혀 있던 기타를 꺼내 들고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특히 주말마다 형의 단독 공연이 벌어졌는데, 흡사 버스킹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실제로 요한이 형은 중학교 시절부터 쉼터 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음악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Dj로 활동한 적도 있을 정도의 실력자라고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웃긴 것이 요한이 형이 노래는 또 지독히도 못 부른다는 사실이다. 쉼터에는 노래방 기계가 있는데, 주말마다 열린 노래방에서 요한 형의 음색은… 음. 말을 아끼고 싶을 정도였다.
어쨌거나 요한 형은 틈이 날 때마다 선생님과 아이들에게 기타를 가르쳐주었다. 덕분에 주말만 되면 쉼터에서는 기타들의 합주 소리가 가득 울렸다. 원래 몸 담고 있던 가정에서 음악을 배운 줄로만 여겼다. 하지만 이는 내 오해였고, 요한 형은 그저 쉼터에서 진행하는 음악 프로그램에 개인의 노력을 더해 실력을 쌓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문득 요한 형을 보고 있자니 내가 부끄러워졌다. 요한 형은 힘든 상황 속에서도 음악을 배우며 자신의 진로를 찾고자 노력하고 있는데, 대체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이런 깨달음이 무색하게도 나는 자책만 할 뿐 직접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껏 무시하던 쉼터생의 새로운 일면을 발견하는 것으로 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광휘는 눈에 비해 유달리 코가 큰 아이였다. 광휘는 내가 청소년 쉼터에 입소하기 전부터 쉼터 생활을 시작했었지만, 이상하리 만큼 주류에서 겉돌았다. 그리고 내가 그런 광휘와 의외로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건 동갑내기라는 공통점 보다 꿈을 갖고 있다는 차이점에 있었다. 내가 보기에 광휘는 어딘가 어설픈 아이였다. 쉼터 생활을 하면서 아르바이트는 하지 않았고, 게임만 주야장천 했다. 쉼터 동생들에게는 멋진 형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 보였으나, 정작 존중받는 행동을 하는 법을 몰랐다. 나는 내심 그런 광휘가 어리게 보였고, 우리는 먼 사이로 남을 뻔했다. 쉼터에서는 저녁 식사 후 매번 청소를 한다. 청소 이후에는 자유 시간인데, 나는 우연히 창고 근처의 으슥한 방에서 광휘가 인터넷 방송을 하고 있는 것을 들었다. 그랬다. 광휘는 인터넷 Bj였다. 광휘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동굴을 울리는 중저음이 연상되었다. 광휘는 타고난 목소리로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하거나 시청자들의 고민을 상담해 주었다. 내 주변에는 인터넷 방송이라는 취미를 갖고 있는 지인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광휘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광휘는 현실에서는 자신감이 부족해 보였으나, 인터넷 방송에서는 배려심이 넘치고 유머스러웠다. 나는 같은 인간인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언젠가 나는 광휘에게 왜 인터넷 방송을 하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광휘는 언젠가 스트리머가 되고자 한다고 답했다. 나는 광휘가 이해되지 않았다. 허황되고 비현실적인 꿈은 생존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 같은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태된다. 동시에 꿈을 꾸고 있는 광휘가 눈부셨다.
이 이야기를 기타 맨 요한 형에게 털어놓았을 때, 요한 형은 자신이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웠던 기억을 일러주었다. 당시에 유튜브에 올라와 있던 중소기업에서 구글로 이직했던 전설적인 프로그래머에 대한 영상을 보면서 열정을 불태웠다고 한다. 비록 구글 입사에는 실패했지만 언젠가 도움이 되지 않겠냐며 미소 지었다. 나는 이해한다고는 말했지만 진실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가 내가 진실로 꿈을 꾸게 되면서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쉼터 선생님 중 한 분은 우리에게 프린트된 시를 나누어 주셨다. ‘내가 어떠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가. 절망이 무엇인지 안다면 당신은 분명 겨울의 의미를 이해하리라... 나 자신이 살아남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내 안의 무언가 바뀐 것이었을까. 나는 다시금 펜을 들었다. 재수에 실패하고 난 뒤에는 전혀 공부를 하고 있지 않았지만, 대학교 복학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머리가 단단하게 굳어 있었지만, 평소에 하고 싶었던 영어 공부부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무척이나 축복받은 사람이었다. 다른 쉼터생들은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대학교로 복학할 여지가 남아 있었다(그렇다고 공부를 하게 된 계기가 행복했던 건 아니다). 이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대학교 등록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찾아보았다. 당시에는 코로나 시기여서 대부분 파트 타임 업무로 쪼개져 있었고, 주 1-2로 나눠서 구인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쿠팡 물류 센터를 가야만 했다. 허리 디스크를 가지고 쿠팡 물류 계약직을 해내기는 어려웠지만, 집품 위주로 업무를 할당 받으면서 꾹 참고 돈을 모았다.
일을 하면서 더러운 일도 많이 경험했다. 어린 나를 좋게 보는 줄 알았던 중년 남자가 자꾸 본인이 묻기 곤란한 질문을 나를 이용해 관리자에게 물으려 한 적이 있었다. 또 언제는 관리자가 추천인 이름에 자신을 써주면 돈을 나눠주겠다고 해놓고, 시치미를 떼려 한 적도 있었다. 여로모로 번잡한 일들이 많았다.
그래도 나는 독립을 위한 돈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런 내 노력을 좋게 보았는지, 쉼터 원장님이 자격증 공부를 위한 학원을 지원해주겠다는 제안을 해주셨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학원을 다니면서 차근차근 미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런 경험들이 차곡차곡 모여 에세이를 쓰기에 이르렀다. 힘든 일도, 울고 싶은 일도 많았지만, 소중한 기억들을 가슴 속에 품으며 청소년 쉼터에 관한 이야기를 쓴다. 나보다 더 위대한 존재들이 있었고, 그들은 단순히 비행 청소년, 가정해체 청소년으로 뭉뚱그려지기에는 너무나 다채로웠다. 그래서 이 글이 부디 그들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원한다. 쉼터나 바깥을 나돌아 다니는 아이들이 있다면 그들에게도 마음 속 깊숙이 이루고 싶은 꿈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