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멜빵 Jun 02. 2021

[리뷰] 영화 : 나를 찾아줘

완벽은 광기를 동반한다

*스포 주의 (결말 스포는 없지만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주의가 필요한 스포가 있습니다)


착하게 굴어

세상에 완벽한 것은 오직 '완벽'이라는 말뿐이다. 무엇이 또 완벽할 수 있을까. 완벽한 정사각형, 완벽한 동그라미, 완벽한 이상향, 완벽한 이상형, 완벽한 삶. 과연 우리가 쉽게 완벽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들은 '완벽'할까. 아니면 마음에서 우러러 나오는 감정을 상대에게 와닿게 전달하기 위한 과장의 표현일까. 마치 '힘들어 죽겠다', '평생 사랑해'와 같은 단어가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이용하기 위해서 실제와 다르게 쓰이듯. 불안한 개인은 끝없이 세상을 향해 거짓말을 한다.




이 남자가 정말 날 죽일지도 모른다




어린아이는 울면 자신이 원하는 걸 가질 수 있다. 보호자의 아래에서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로서 누리는 소소한 특권이다. 아직 울기 이외의 의사소통법을 배우는 중이기에 주어지는 어드벤티지이기도 하다. 안타까운 점은 아이의 존재가 귀해진 사회일수록 이러한 아이의 특권을 어른이 되어서도 누리려고 하는 피터팬들이 많다는 점이다. 어른은 이제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남도 나와 똑같이 이 낯선 땅에 떨어져서 살아가고 있는 모험가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보호자의 그늘에서 누리던 특권을 너무 사랑한 피터팬들이 욕심을 부리고 보호자가 적당한 때에 가르침을 주지 못하면 그 쉬운 사실을 등한시한 채로 커버린다. 각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무엇을 얻어야만 하는 어른들의 향연이다.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그러하듯 주인공은 버프를 받아 죽음도 면하고 무슨 짓을 해도 타당성을 이해받는다. 원래는 주인공이 죽으면 이야기가 끝나버리는 탓이자, 다른 인물에 비해 분량이 많은 주인공을 이해할 여지가 많이 제공된 탓에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버프를 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모든 개인이 가진다면 어떨까. 모든 개인은 '다른 사람은 이해하지 못해도 자신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가지는 부분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이러한 정당화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우리는 어디까지 '그 이유에 의해 포용될 만 한가'하는 문제를 맞이하게 된다. 이 문제는 확장하면 '장발장은 빵을 훔칠 만 했나?, 조커는 빌런이 될 만 했나?, 소수는 다수를 위해 희생될 만 한가?, 대통령의 목숨이 가난한 소녀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겨질 만 한가?'와 같은 사회적 문제들이 된다. 이제는 보호자가 없는 성인이 움직이는 세상의 무게는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나 이외의 존재를 지나가는 배경 존재로 여기는 피터팬들이 세상을 움직이면 어떨까. '나'는 주인공으로서 '내가 타당이 여길만한 이유'가 있다면 '내 인생'을 위해 '내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쟁취해도 되는 사람들의 전쟁이 시작된다.


전쟁은 패자와 승자가 나뉘지만 '내'가 주인공인 인생에서 '나'는 절대 패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 결과로 사람들이 선택한 정당화가 '완벽한 척하기'이다. 나의 '주인공스럽지 않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부분을 감추고 완벽한 척 연기를 하며 주인공의 지위를 유지하겠다는 전략이다. 슬프게도 모두에게는 뱁새스러운 부분과 황새스러운 부분이 각각 존재한다. 그래서 뱁새스러운 부분을 감추려는 노력에서는 다리가 찢어지는 고통이 뒤따른다. 바로 그런 인간의 면모를 관객에게 충격적으로 전달하고자 과장해 만들어낸 영화가 바로 이 '나를 찾아줘(Gone Girl)'이다.




닉 던은 내 자존심, 내 존엄성, 내 희망, 내 돈을 빼앗아 갔다

내가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빼앗고 빼앗았다

그건 살인이다




에이미의 인생을 충분히 완벽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완벽하지 못했던 동반자는 다방면으로 에이미의 삶을 망치고 들었다. 에이미에게는 이 삶은 다시 완벽하게 고쳐져야 했다. 자기 스스로 죽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속은 열불이 올라와도 냉정하게 한땀 한땀 완벽한 시나리오를 짰다. 에이미의 완벽한 삶 되찾기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에이미에게 겨우 불륜에 의한 이혼 따위는 완벽한 주인공의 삶이 되기엔 흔하고 아름답지도 않다. 무엇보다 완벽하지 못한 닉이 완벽한 자신을 망치고 들었다는 사실을 널리 알려서 자신의 완벽함을 다시 강조해줘야 했다. 주인공을 향한 모두의 공감이 빠지면 겨우 지나가는 단역 둘의 흔한 치정 문제일 뿐이다. 그래서 더욱 처절하게 자신의 삶을 포장하는 시나리오가 필요했다. 세상의 절대 악이 뭘까. 나를 시골로 끌어들인 것, 내 돈을 빼앗은 것, 불륜을 저지른 것. 에이미에게는 커다란 일이지만 3자들에게는 술자리에서 각자의 생각대로 씹어 넘길 정도의 가십이다. 살인. 자신의 욕심을 위해 동반자의 모든 것을 빼앗고 마침내 죽이기까지 한 살인자. 이미 죽은 사람에게 손가락질할 사람도 없겠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상황도 딱하겠다. 에이미의 완벽함에 박수를 보내줄 관객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렇게 어메이징 에이미의 결말이 정해졌다.


언제나 완벽한 삶을 가져야만 한다는 광기에 사로잡히게 된 건 오랫동안 지속된 습관의 결과다. 짧게 등장한 에이미의 부모님은 에이미와 참 달라서 참 많이 부딪히는 듯 보인다. 에이미가 결혼을 결정한 이유 중 일부는 부모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리라 추측될 정도다. 그런데 묘하게도 사람의 영유아 시절은 특히나 정체성 형성에 중요해서 좋든 싫든 자신을 기른 보호자의 성향을 닮는다. 딸의 행복보다 화려한 명성을 좋아하던 부모의 욕심의 불꽃은 어느새인가 거기에 환멸을 느껴온 에이미에게 옮겨 붙어 버렸다. 그렇게 부모로의 억압으로 시작된 에이미의 악몽은 결국엔 본인 스스로가 악몽에 몸을 던지게 만들었다.




전부 다 맞춰줬다고




https://youtu.be/cLxCv3LySKM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나의 특별하지 않음들을 인정해 가는 일인지 모른다. 내가 특출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무뎌지지 않는 씁쓸함을 느끼게 한다. 첫걸음마에 쏟아지던 박수와, 첫 옹알이에 쏟아지던 환호가 없는 세상은 아무리 잘나보려 해도 나를 지나가는 배경으로 깎아내리려는 악당들에게 공격당하는 일상의 연속이다. 하지만 우리는 오직 특별하지 않기에 친구를 사귀고 같이 살아갈 동료를 얻을 수 있다. 모든 면에서 특별하려는 집착에서 벗어나면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이 명확히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는 편집 없는 100%의 나를 적당히 검열해서 세상에 보이는 데에 실패한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적당함. 항상 우리에게 의문을 남기는 이 단어를 영화를 보고 난 후의 당신은 어떻게 해석하고 싶어졌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