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에 대한 다양한 관점

칭의 바로 보기

어느 일요일 저녁, 교회에서 돌아온 영광이는 복잡한 표정으로 거실 소파에 앉았다. 아버지는 책을 읽다가 아들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아버지: 무슨 일이니? 오늘 설교 때문에 고민이 생긴 것 같구나.

영광: 아빠, 오늘 교회에서 들은 이야기가 좀 헷갈려요. 어떤 집사님은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구원받았고, 앞으로 어떻게 살든 그건 별개의 문제다’라고 하셨고, 다른 분은 ‘우리는 말씀에 따라 살면서 구원을 완성해 나가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둘 다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누구 말이 맞는 거예요?

아버지: 아, 그 질문은 수백 년 동안 기독교에서 논쟁해 온 중요한 주제란다. 칭의라는 교리와 관련이 있지. 칭의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것을 의미해. 이게 한 번의 선언으로 끝나는 건지, 아니면 평생에 걸쳐 이루어가야 하는 과정인지를 놓고 많은 논쟁이 있었어.


1. 값싼 은혜에 대한 경고


아버지: 혹시 '값싼 은혜'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니?

영광: 값싼 은혜요? 그게 뭐예요?

아버지: 디트리히 본회퍼라는 독일의 목사님이 나치 시대에 했던 말이야. 그분은 당시 독일 교회를 향해 ‘값싼 은혜란 회개 없는 용서요, 제자도 없는 세례이며, 십자가 없는 성찬’이라고 질타하셨지.

영광: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아버지: 쉽게 말하면, 구원을 단순히 ‘법적 선언’으로만 이해하고 삶의 변화는 요구하지 않을 때, 복음은 그 능력을 잃어버린다는 거야. 마치 결혼식은 올렸지만 실제로는 부부로 살지 않는 것과 같지. 형식만 갖추고 실제 관계는 없는 거란다.


2.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


영광: 그럼 가톨릭과 개신교는 이 문제를 어떻게 다르게 보나요?

아버지: 좋은 질문이야. 로마 가톨릭은 ‘의화(義化)’라고 해서, 구원을 단번에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점진적인 과정으로 봐. 하나님의 의로운 성질이 죄인의 영혼 안에 실제로 ‘주입’‘되어서, 그 사람을 점진적으로 의로운 존재로 변화시켜 나간다고 믿지.

영광: 그러니까 구원이 과정이라는 거네요?

아버지: 맞아. 가톨릭에서는 칭의와 성화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아. 둘이 하나의 과정으로 보는 거지. 이런 관점은 어거스틴이라는 초대교회 신학자에게서 기원을 찾을 수 있어.


영광: 그럼 개신교는 어떻게 다르게 보나요?

아버지: 종교개혁가들, 특히 마틴 루터는 칭의를 하나님께서 죄인을 향해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단회적 선언’으로 봤어.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지.

영광: 그게 ‘오직 믿음으로’라는 말씀이네요!

아버지: 정확해! 칼빈은 여기서 더 나아가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명확히 정립했어. 칭의는 믿는 순간 단번에 일어나는 법적인 ‘신분’의 변화이고, 성화는 칭의를 받은 신자가 평생에 걸쳐 내면적으로 거룩하게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구분한 거야.

영광: 그럼 칭의는 한 번에, 성화는 평생에 걸쳐 이루어진다는 거네요?

아버지: 그렇지. 중요한 건 이 둘이 개념적으로는 구분되지만, 실제 신자의 삶에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거야. 참된 칭의를 받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성화의 열매를 맺게 되고, 성화는 칭의의 확실한 증거가 된단다.


3. 현대의 새로운 논쟁


영광: 그럼 이제 다 해결된 거 아니에요?

아버지: 그게 그렇지 않단다. 20세기 후반에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라는 학파가 등장했어. 톰 라이트 같은 학자들이 종교개혁의 칭의론이 바울을 오해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거지.

영광: 오해했다고요? 어떻게요?

아버지: 이 학자들은 1세기 유대교의 맥락에서 바울을 다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해. 예를 들어, 바울이 비판한 ‘율법의 행위’가 구원을 얻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하는 할례, 음식법 같은 ‘정체성 표지’라는 거야.

영광: 그럼 라이트는 칭의를 어떻게 설명하나요?

아버지: 라이트는 칭의가 이중적 구조를 가진다고 봐. 첫째는 믿음을 통해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음을 선언하는 ‘현재적 칭의’고, 둘째는 마지막 심판의 날에 내려지는 ‘미래적 칭의’야. 이 최종 칭의는 최초의 믿음만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낸 전 생애를 근거로 내려진다는 거지.

영광: 그럼 결국 행위도 중요하다는 말씀이네요?

아버지: 그렇게 볼 수도 있지. 우리나라의 일부 학자들도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있어. 칭의를 ‘이미와 아직(already-not yet)’의 구조로 보는 거야. 믿는 순간 ‘이미’ 칭의를 받았지만, 하나님 나라가 ‘아직’ 완전히 임하지 않았기에 칭의도 완성되지 않았다는 거지.


4. 구원의 확신 문제


영광: 그럼 전통적인 개신교 관점과 새 관점 중에 어느 게 맞는 건가요? 저는 구원받았다고 확신해도 되는 건가요, 아니면 계속 불안해해야 하나요?

아버지: 그게 바로 핵심 질문이야. 전통적 칭의론은 신자에게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확신을 제공했어. 왜냐하면 구원의 근거가 우리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성된 의에 있기 때문이지. 구원은 나의 상태나 노력에 따라 변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이루신 사건에 근거한 ‘보장된 신분’이란다.

영광: 그럼 안심해도 되는 거네요!

아버지: 잠깐,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어. 라이트의 미래적 칭의 개념은 여기에 중요한 긴장감을 부여해.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전 생애를 통해 완성되어야 할 ‘소망' 가운데 이뤄가는 과정‘이 되는 거야. 빌립보서 2장 12절의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을 부각하는 거지.

영광: 그럼 결국 어느 게 맞는 건가요? 확신을 가져야 하나요, 두려워해야 하나요?


5. 구원은 관계의 문제


아버지: 영광아,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구원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봐야 해. 구원은 단순한 법정적 선언이나 일방적 계약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간의 ‘관계’로 이해해야 한단다.

영광: 관계요?

아버지: 그래. 결혼관계를 생각해 보렴. 한쪽 배우자가 아무리 신실해도 상대방이 외도를 한다면 결혼관계는 깨어질 수 있어. 이건 신실한 배우자의 의지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 자체가 가진 본질적 속성 때문이야.

영광: 아, 그러니까 하나님은 완전히 신실하시지만, 우리가 관계를 깨뜨릴 수 있다는 말씀이시네요?

아버지: 바로 그거야! 하나님은 구원의 영속성에 대해 완전히 신실하시고 당신의 약속을 결코 철회하지 않으셔. 그러나 관계의 속성상, 인간의 역할과 책임이 간과될 수는 없단다.

영광: 성경에 그런 예가 있나요?


출애굽의 예

아버지: 물론이지.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의 여정을 보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의 기적을 통해 완전히 바로의 손을 벗어나는 구원을 경험했어. 하지만 출애굽의 역사가 곧바로 가나안 입성을 보장하지는 않았지.

영광: 맞아요!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었잖아요.

아버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어.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라고 말이야.

영광: 우리를 위한 본보기라고요?

아버지: 그래. 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경고하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이야. 히브리서도 비슷한 메시지를 전해.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 가졌던 확신을 끝까지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을 함께 누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라고.

영광: ‘끝까지‘라는 말이 중요하네요...


관계의 특징

아버지: 바로 그거야. 관계는 본질적으로 쌍방향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을 요구한단다. 성경은 반복해서 이렇게 권면하지. ‘깨어 있으라’, ‘믿음에 굳게 서라’,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라고.

영광: 그런데 아빠, 히브리서 4장 11절에 이런 말씀도 있잖아요. ‘우리는 그 누구도 지난날 불순종했던 사람들처럼 되지 않으며,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라고요.

아버지: 잘 기억하고 있구나! 디모데전서 6장 12절도 봐. ‘믿음을 지키는 것은 달리기 시합과도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며, 할 수 있는 한, 승리할 때까지 열심히 뛰어가십시오’라고 하잖니.

영광: 구원은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이네요...


6. 칭의와 성화를 분리할 수 없다


아버지: 영광아, 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분리할 수 없다’고 했어.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실상 이 둘을 분리하고 있단다.

영광: 어떻게요?

아버지: ‘이미 구원받았다’고 안주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지 않는 거지. 마치 처음 교회에서 들었던 그 집사님의 말씀처럼 말이야.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하니?

영광: 히브리서 3장 12절이요!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아버지: 맞아. 그리고 요한복음 8장 31절은 뭐라고 하지?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영광: ‘내 말에 거하면’이라... 계속해서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뜻이네요.

아버지: 정확해. 그게 바로 관계의 속성이야. 하나님과의 관계는 자동으로 유지되는 게 아니라, 지속적인 경계와 노력을 요구한단다.


결론: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영광: 아빠, 이제 좀 이해가 돼요.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버지: 두 가지를 기억하렴. 첫째,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근거한다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확신을 준단다. 둘째, 하지만 그 구원은 관계의 문제이기에, 우리의 책임 있는 반응을 요구한다는 것. 날마다 말씀 안에 거하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힘쓰는 거지.

영광: 그러니까 특정 교리의 틀에 사로잡혀 ‘이미 구원받았다’고 안주하는 것보다,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날마다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며 신앙생활에 힘쓰는 게 중요하다는 거네요?

아버지: 그래, 바로 그거야. 구원의 확신과 경건한 긴장감은 서로 모순되지 않아. 오히려 둘 다 성경적이란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되, 동시에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해.

영광: 감사해요, 아빠. 이제 처음 질문에 대한 답을 알 것 같아요. 구원은 단순히 과거의 결정이나 미래의 사건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가는 것이네요.

아버지: 잘 이해했구나, 영광아. 이제 너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할게. 첫째, 너는 날마다 말씀에 따라 살려고 애쓰고 있니? 둘째, 그 이유는 무엇이니? 셋째, 처음 교회에서 들었던 두 집사님의 말씀에 대한 너의 답변은 무엇이니?

영광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영광: 네, 아빠. 저는 날마다 말씀에 따라 살려고 노력해야겠어요. 그 이유는... 제가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이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이고, 그 관계를 지키고 싶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두 집사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둘 다 일부분만 맞는 것 같아요. 구원은 확실히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그것을 소홀히 여기거나 관계를 무시한다면 위험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인 것 같아요.

아버지: 잘 생각했어, 영광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날마다 말씀 안에 거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진정한 제자의 길이란다.


[점검하기]

1. 나는 날마다 말씀에 따라 살려고 애쓰고 있는가?

2. 그 이유는 무엇인가?

3. 도입부에 적힌 두 집사님의 말에 대한 당신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이전 09화영, 혼, 육의 구별과 그 유익(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