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충만 바로 알기
프롤로그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솔직하게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구원받기 전과 지금, 삶이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많은 분들이 이 질문 앞에서 멈칫합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영접했고, 세례도 받았고, 주일마다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막상 일상으로 돌아오면 여전히 분노하고, 여전히 흔들리고, 여전히 내 힘으로 살려다 지쳐 쓰러집니다. 신앙생활이 기쁨이 아니라 의무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고, 말씀은 알겠는데 도무지 그대로 살아지지 않는 자신을 보며 자책하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혹시 우리가 중요한 분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성경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시며 또 다른 분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사역을 돕는 조연이 아닙니다. 창세기 첫 페이지부터 수면 위를 운행하시던 그 영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안에서 우리를 채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장은 삼위 중 한 분이신 성령님을 다시 발견하는 여정입니다. 성령께서 구약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일하셨는지, 그리고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그분과 동행할 수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구약성경 — 하나님의 영은 역사의 결정적 순간마다 등장하십니다
구약성경을 읽다 보면 흥미로운 패턴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역사의 결정적인 변곡점마다 어김없이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배경으로 계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직접 이끌어 내시는 주체로 활동하십니다.
창조의 영
태초에 하나님의 영은 창조의 현장에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를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2)
그리고 3절부터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를 시작하십니다. 영과 말씀이 함께 창조의 역사를 이루어 나간 것입니다. 이 첫 장면에서 성령님은 역사의 방관자가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의 일에 깊이 동참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의 영
출애굽 때 홍해를 가르는 역사에도 성령이 함께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5장 8절과 10절에 등장하는 '기운'과 '바람'은 히브리어로 모두 성령을 가리키는 '루아흐'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역사였습니다.
능력의 영
사사 시대에 하나님의 영은 사사들에게 능력으로 임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사사기 3:10)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성령이 능력으로 임하셨다는 것은 역으로 그 사람에게 원래 그 능력이 없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옷니엘은 원래 이방인이었습니다. 출신의 한계를 지닌 그가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성령께서 그 한계를 덮으시고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리더십의 영
왕정 시대에 하나님의 영은 사울과 다윗에게 임하여 왕으로서의 자격을 인증하셨습니다(사무엘상 10:1, 16:13).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인간의 선택이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임재로 세워졌습니다.
회복의 영
포로 시대, 소망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영은 회복의 영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 환상에서 하나님은 사방에서 생기를 불어넣어 뼈들을 살아나게 하십니다. 여기서 '생기'로 번역된 단어도 역시 '루아흐'입니다. 절망 속에 있는 자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 그것이 성령의 일하심입니다.
만민의 영
요엘 선지자는 미래를 향한 놀라운 예언을 남겼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요엘 2:28)
성별도, 신분도, 나이도 가리지 않는 성령의 임재가 예언된 것입니다. 이 예언은 오순절 사건을 통해 그대로 성취됩니다.
신약성경 — '오실 분'이 '오신 분'이 되셨습니다
구약이 성령을 '오실 분'으로 바라본다면, 신약은 '이미 오신 분'으로서의 성령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성령과 함께였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셨습니다(마태복음 1:18).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는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고(마태복음 3:16), 마지막으로 이 땅을 떠나시면서 보혜사 성령이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요한복음 16:7). 부활 후에는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20:22).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성령의 역사와 함께였습니다.
오순절 —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체험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의 강림으로 교회가 탄생했고, 복음이 세상으로 뻗어 나가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요엘이 예언한 "만민에게 부어질 성령"의 약속이 역사적 현실이 된 순간이었습니다.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성령의 오심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벽을 허물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부어지는 장면(사도행전 10:45)은 유대인 제자들을 크게 놀라게 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성령이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돌아보면 결코 놀랄 일이 아닙니다. 성령은 처음부터 사람의 출신이나 혈통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따라 역사하시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정작 성령님의 도우심에는 무관심해지기 쉽습니다. 물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얻은 새 생명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 자라야 합니다. 구원이 도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인 것처럼, 성령과의 동행은 구원 이후의 삶에서 필수적인 여정입니다.
야구나 피아노를 배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론 강의만 계속 들어서는 실력이 늘지 않습니다. 코치의 지도하에 몸으로 직접 실행해야 실력이 붙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배운 말씀대로 이 세상에서 살아내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 역시 우리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살아낼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주시지만, 성장은 성령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성령에 관한 이야기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질문입니다. 교단과 신학 전통에 따라 입장이 다르지만, 핵심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개혁주의의 입장
개혁주의 신학은 성령의 내주와 성령세례를 구원의 순간에 함께 일어나는 사건으로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 내주하시며 그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연합시키십니다. 이것이 곧 성령세례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고린도전서 12:13)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로마서 8:9)
성령충만은 구원 이후 성도의 삶 속에서 성령의 지배를 온전히 받는 상태로,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경험이어야 합니다. 신자가 무기력하게 사는 이유는 성령세례를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미 내주하시는 성령님께 순종하지 않아 성령충만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은사주의의 입장
은사주의 신학은 세 가지를 구별합니다. 성령의 내주는 구원을 받을 때 일어나는 것이고, 성령세례는 구원받은 신자가 봉사와 증거의 능력을 얻기 위해 구원 이후에 별도로 체험하는 강력한 성령의 임재이며, 성령충만은 그 능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며 살아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어느 쪽이 맞느냐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살아가는 입장에서는 이론적인 논쟁보다 실제로 삶에 도움이 되는 핵심을 붙잡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2:3)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에게는 성령님이 이미 그 안에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지하게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성령님과 실제로 살아있는 관계를 맺고 있는가? 성령의 열매가 내 삶에서 맺어지고 있는가?"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표현은 헬라어 원문에서 수동태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성령충만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우리를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충만을 원하는 것보다, 성령님은 더욱 우리를 채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성령충만하지 못할까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에베소서 4:30)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데살로니가전서 5:19)
성령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우리가 죄와 불순종 가운데 살아갈 때 근심하실 수 있습니다. 강권적으로 우리를 지배하지 않으시기에, 우리의 마음이 닫혀 있으면 충만하게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결국 성령충만의 핵심은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에 있습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 1:8)
말씀을 묵상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충만은 삶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바울은 앞 절에서 '육체의 일'을 열거할 때 복수형을 사용했지만, '열매'는 단수형으로 기록했습니다. 이 아홉 가지는 각각 독립된 덕목들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하나의 열매가 다양하게 표현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을 보면 이것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고린도전서 13:4-5)
오래참음, 온유, 양선… 이것들이 모두 사랑의 표현입니다. 결국 성령의 열매는 사랑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잘하는 특정 덕목만 골라 맺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중심으로 인격 전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언뜻 말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불편한 가능성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요나의 이야기
요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니느웨로 가라고 하시자 요나는 정반대 방향으로 달아났습니다. 폭풍 속에서 선원들이 그를 깨웠을 때, 요나는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요나 1:9)
신앙고백만 놓고 보면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나에게는 니느웨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고백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비단 요나만의 이야기일까요?
다윗의 이야기
하나님이 친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사무엘상 13:14)이라고 부르신 다윗. 시편의 절반 이상을 지은 예배자. 그런데 사무엘하 11장은 그 다윗의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탐내어 동침했고, 임신 사실을 덮기 위해 충성스러운 신하 우리아를 전쟁터의 최전선에 세워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사무엘하 11:27)
다윗은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하나님을 향한 고백과 이웃을 향한 사랑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양과 염소를 나누시는 장면을 말씀하십니다. 왼편에 선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마태복음 25:44)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고 있었고, 믿는다고 고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태복음 7:19-20)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사랑이 가능할까요? 요한복음 21장,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가 그 힌트를 줍니다.
세 가지 사랑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랑을 여러 개념으로 구분했습니다.
에로스(Eros)는 남녀 사이의 낭만적 사랑입니다. 그러나 본질은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입니다. 상대가 나를 만족시켜 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조건부의 자기중심적 사랑입니다.
필레오(Phileo)는 친구 사이의 우정, 동료애입니다. 에로스보다 훨씬 고상합니다. "네가 나를 좋아하니 나도 너를 좋아한다"는 주고받는 관계에 기초합니다.
아가페(Agape)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조건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상대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상대의 어떠함과 무관하게 의지적으로 사랑하기로 결단하는 것, 바로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
디베랴 호숫가에서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한글 성경은 모두 '사랑'으로 번역하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 "네가 나를 아가파오(아가페) 하느냐?"
이것은 "너는 나를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는 헌신적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입니다. 과거의 베드로라면 거침없이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연약함을 뼈저리게 경험한 베드로는 감히 아가페로 대답하지 못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필레오(친구로서 사랑함) 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저는 주님을 친구로서 깊이 사랑합니다. 하지만 주님처럼 십자가를 질 만큼의 완전한 사랑이라고 말할 자격이 제게는 없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한계를 솔직하게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질문에서 예수님이 단어를 바꾸십니다. "네가 나를 필레오 하느냐?"
예수님은 아가페의 기준을 고집하지 않으시고, 베드로가 대답할 수 있는 필레오의 수준으로 내려와 주셨습니다. "지금 네가 친구로서의 우정 정도로밖에 사랑하지 못한다 해도, 나는 그 마음을 받겠다"는 수용과 용납의 메시지였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째 질문에 근심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낮은 수준까지 내려오신 것에 대한 죄송함, 그럼에도 자신을 받아주시는 그 사랑에 마음이 찔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현재 수준인 필레오를 받아주셨지만, 그가 거기에 영원히 머물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한복음 21:18)
훗날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게 될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지금은 필레오라고밖에 대답하지 못하지만, 성령이 임하면 결국 목숨을 바치는 아가페의 사랑을 완성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실제로 오순절 이후의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그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했고, 결국 주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필레오가 아가페로 변화된 것, 그것이 성령충만의 결과였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많은 경우 우리는 신앙생활을 에로스의 단계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축복해 주시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나에게 유익이 없으면 언제든 식어버릴 수 있는 사랑입니다.
조금 더 성숙해지면 필레오의 단계로 나아갑니다. 주님과 정서적인 친밀감을 누립니다. "주님이 내 친구 같아서 좋다"고 고백합니다. 귀한 신앙의 단계이지만, 여전히 내 감정과 상황이 좋을 때 유효한 사랑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인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내 감정이 메마르고 상황이 척박해도, 때로는 손해가 따른다 할지라도 의지적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요나, 마태복음 25장의 왼편에 선 사람들, 그들의 문제는 의지의 부족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면서도, "주여"라고 부르면서도, 이웃을 향한 아가페의 사랑이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힘으로는 아가페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를 찾아오셨고, 그의 필레오를 받아주셨으며, 마침내 성령의 능력으로 아가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지금 "주님, 저는 이 정도밖에 사랑하지 못합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더라도 낙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높이에 맞춰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자리에 두지 않으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빚어 가십니다.
에필로그 — 오늘도 우리 안에 계시는 분
태초에 하나님의 영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가득한 수면 위를 운행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그 자리에서 성령이 임하시자 빛이 생겨나고 생명이 움텄습니다.
그 동일한 영이 오늘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홍해를 가르던 구원의 영, 사사들에게 능력으로 임하던 영, 마른 뼈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던 회복의 영, 오순절에 강림하여 교회를 탄생시키신 성령님. 그분이 지금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마십시오. 성령을 소멸하지 마십시오.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성령충만은 특별한 사람만 누리는 신비로운 경험이 아닙니다. 죄로부터 돌이키고, 말씀에 순종하고, 기도로 그분께 나아갈 때 성령님은 우리를 채우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간절하게, 성령님은 우리를 충만하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점검하기]
1. 성령충만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그 이미지가 이 장을 읽고 나서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2. 이 글에서 말하는 성령충만의 목적은 무엇인가?
3.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을 실제로 실천하려고 애쓰고 있습니까?
4.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서 여러분 자신의 모습은 어느 단계에 있습니까? 에로스, 필레오, 아가페 중 어디에 해당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