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과 인간의 자유의지

예정론 다시 생각하기

당신은 선택받았습니까, 선택했습니까?

"나는 왜 구원받았을까?"

어느 날 새벽 기도 중에 한 청년이 이 질문 앞에 멈춰 섰습니다. 같은 환경에서 자란 친구는 교회를 떠났는데, 자신은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만 특별히 선택하셨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자신이 더 나은 선택을 했기 때문일까요?

이 물음 속에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담겨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을 미리 정해놓으셨다면, 나머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반대로, 구원이 전적으로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이 신학적 논쟁의 핵심에는 단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입니까, 인간의 선택입니까?"


1. 논쟁의 시작 —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이 논쟁은 16-17세기 종교 개혁 시대에 본격화되었지만, 그 뿌리는 훨씬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5세기 초대 교부였던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이 그 출발점입니다.

두 사람의 주장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도덕적 능력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아담의 타락은 아담 개인에게만 해당하며, 모든 인간은 죄 없이 태어납니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스스로의 운명을 선택하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올바른 삶의 모범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어거스틴은 정반대로 주장했습니다.

원죄는 실재하며 모든 인류에게 유전됩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은혜에 달려 있으며, 은혜의 도움 없이는 어떤 선도 행할 수 없습니다.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훗날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논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후 더욱 정교한 형태로 발전하여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라는 두 체계로 이어졌습니다.


2.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 다섯 가지 핵심 쟁점

이 두 입장의 차이를 다섯 가지 핵심 주제로 살펴보겠습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나씩 쉽게 풀어 보겠습니다.

1) 인간은 얼마나 타락했습니까?

칼빈주의는 인간이 아담의 타락 이후 영적으로 완전히 부패했다고 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찾거나 복음에 응답할 수 없는 '죽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한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선행 은총'을 베푸셔서, 복음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일부 회복시켜 주셨다고 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 초청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은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셨습니까?

칼빈주의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인간의 행위나 믿음을 미리 보고 결정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주권적 뜻에 따라 구원받을 자와 그렇지 않을 자를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셨다고 가르칩니다.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께서 누가 자유의지로 복음을 믿을 것인지를 미리 아시는 '예지(豫知)'를 바탕으로 그들을 선택하셨다고 봅니다. 인간의 믿음이 구원 선택의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칼빈주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이 오직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만을 위해 적용된다고 봅니다. 이를 '제한 속죄'라고 합니다.

알미니안주의는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를 위해 차별 없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고 가르칩니다. 누구든지 믿는 자는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4) 하나님의 은혜는 거부할 수 없습니까?

칼빈주의는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선택하신 사람에게 베푸시는 성령의 은혜는 인간의 의지로 거부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유효하게 작용하여 그 사람을 믿음으로 이끕니다.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거부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 제안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습니다.


5)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합니까?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은혜로 참되게 구원받은 성도는 결코 구원에서 떨어져 나갈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끝까지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표현이 여기서 나옵니다.

알미니안주의는 구원은 지속적인 믿음과 순종을 조건으로 한다고 봅니다. 신자가 스스로 믿음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거부하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3. 성경은 무엇을 말합니까?

흥미로운 것은 성경에 두 입장을 모두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을 강조하는 말씀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에베소서 1:4-5)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요한복음 6:44)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요한복음 15:16)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사도행전 13:48)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데살로니가후서 2:13)


인간의 응답과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말씀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요한계시록 3:2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마태복음 11:28)
"내가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마태복음 23:37)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너는 생명을 택하라." (신명기 30:19)
"주의 약속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후서 3:9)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명확히 가르치면서, 동시에 인간의 자유로운 결단과 그에 따른 책임을 똑같이 요구합니다. 이것이 이 논쟁이 수천 년 동안 해결되지 않은 이유입니다.


4. 조화를 향하여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조화의 남용 - '값싼 은혜'와 아르뱅주의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각각 정교한 신학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에서는 이 두 체계의 일부가 편의적으로 결합되거나 오용되면서 윤리적 해이를 정당화하는 '값싼 은혜'로 전락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속칭 '아르뱅주의(Arvinism)'입니다. 이는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와 칼빈주의(Calvinism)를 합성한 용어로, 각 체계에서 위안을 주는 교리만 취하고 책임을 요구하는 교리는 버리는 편의주의적 조합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알미니안주의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는 가르침만 취하면서,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조건부 견인'의 경고는 무시합니다.
칼빈주의에서는 '한 번 받은 구원은 절대 취소되지 않는다'는 '성도의 견인' 교리만 받아들이면서, 자신이 참된 택자인지 확인하기 위한 엄격한 자기 성찰의 과정은 외면합니다.
그 결과 "나는 구원의 확신이 있으니, 이제 어떤 죄를 지어도 나의 구원은 영원히 보장된다"는 위험한 논리가 탄생합니다.
이는 사실상 '구원파적 복음'과 유사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조화의 불가능? - 이율배반 속의 신비

일부 신학자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만세 전에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구원받을 자와 버려둘 자를 정하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예정)과, 모든 인간에게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시며 그 선택에 따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인간의 책임) - 이 두 진리는 성경 안에서 동등한 권위로 선포되지만, 인간의 유한한 이성으로는 완벽하게 조화시키기 어렵다."
"따라서 이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용어는 '이율배반(antinomy)'이며,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은 논리적 모순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신적 진리의 양면성이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은 모두 우리의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신비라고 받아들인다 해도, 실제로 우리는 어느 한쪽의 견해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에서는 회색지대가 없습니다. 우리는 뜨겁거나 차갑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필자는 이율배반으로 남겨두기보다는, 조화로운 해석을 시도하고자 합니다.


칼빈주의가 등장한 배경을 이해하면 도움이 됩니다

중세 가톨릭 교회는 구원을 위해 교회의 성례와 인간의 선행, 공로를 강조했습니다. 종교 개혁 이후 교회를 떠난 사람들은 깊은 불안에 빠졌습니다. "교회의 예식에 참여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 아닐까?"

칼빈은 바로 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구원이 인간의 행위나 교회의 예식이 아니라 창세 전 하나님의 변치 않는 선택에 달려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면, 예정론이 왜 등장했는지가 더 잘 이해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자유의지가 필요합니다

성경의 핵심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본질은 강요될 수 없습니다. 프로그래밍된 로봇의 반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길 원하신다면, 우리에게 '거부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야만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모든 것이 하나님의 각본대로만 움직인다면,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도 결국 하나님께 돌아가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공의로운 심판이 정당하려면, 인간에게 선택권이 있어야 합니다.


은혜는 인간의 믿음 때문에 희석되지 않습니다

혹시 이런 걱정이 드실 수 있습니다.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의 선택이라면,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진리가 훼손되는 것 아닌가요?"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억만장자가 어떤 가난한 사람에게 100억을 주기로 했습니다. 단, 그 돈을 받으려면 은행에 가서 통장을 개설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통장을 개설해서 돈을 받았다면, 이것은 은혜입니까, 대가를 지불한 거래입니까?

답은 분명합니다. 통장 개설은 대가가 아닙니다. 100억은 여전히 값없이 주어진 선물입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하지, 하나님께 무언가를 지불하는 대가가 아닙니다. 구원의 가치는 인간이 어떤 방법으로도 지불할 수 없기 때문에, 은혜로 주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왕의 완악함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성경에는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구절이 있습니다(출애굽기 4:21, 9:12). 이것은 하나님이 바로의 자유의지를 강제로 조종하셨다는 뜻일까요?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가 까마귀를 쫓으려고 돌을 던졌고, 까마귀가 날아갔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까마귀를 날려 보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버지가 까마귀의 날개를 기계적으로 조종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까마귀는 외부 자극에 대해 자기 본능대로 반응했을 뿐입니다.

바로의 경우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요구가 주어졌을 때, 바로 내면의 죄성과 교만이 그 앞에서 격렬하게 반응하여 스스로 거부한 것입니다.

같은 비가 내려도 좋은 땅에서는 열매를 맺고, 가시덤불에서는 가시만 무성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 바로를 완악하게 하셨다는 것은 악을 주입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바로 스스로 자신의 악한 본성을 드러내도록 상황을 이끄셨다는 의미입니다.


5. 조심해야 할 함정

신학이란 무엇일까요?
신의 학문(OF GOD)일까요,
신에 대한 학문(ABOUT GOD)일까요?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극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가령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인 권위가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말씀은 절대적인 권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 자체가 유한하고 오류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신학 역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학문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권위가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독선입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어떤 신학도,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해 완벽하게 정의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서로 견해가 다른 신학 입장을 견지하는 것은 어쩌한 유한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특정 신학적 견해에 근거하여 다른 신학적 입장에 서 있는 상대방을 정죄하는 것은 피해야 하며, 서로의 신학적 입장을 이해하며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필자가 쓴 글들도 답안이 될 수 없으므로 열린 마음으로 대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에필로그

어느 날, 한 제자가 신학자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구원은 하나님의 예정입니까, 인간의 선택입니까?"

신학자가 대답했습니다.

"천국 문 밖에서 보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오라.' 그러나 천국 문 안으로 들어가 뒤를 돌아보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창세 전에 택하심을 받았느니라.'"

이 지혜로운 비유가 두 입장의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합니다.

우리는 지금 천국의 문 밖에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은 이것입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요한계시록 22:17)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예정의 교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지, 게으름의 베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웨슬리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되, 마치 모든 것이 당신에게 달린 것처럼 일하십시오."

두 거장의 지혜는 하나의 진리를 향합니다. 구원론은 머리로만 이해하는 지식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야 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십시오. 그분이 당신을 부르셨고, 당신의 구원을 끝까지 완성하실 것입니다. 동시에 그 은혜에 날마다 응답하며,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혹시 지금 이 물음이 마음에 남아 있습니까?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인가, 나의 선택인가?"

어느 논리나 교리가 완전히 이해되지 않더라도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당신은 선택받았습니다. 그러니 선택하십시오.


[점검하기]

1.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중 어느 입장이 더 자연스럽게 와닿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 혹시 자신도 모르게 '값싼 은혜'의 함정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3. "하나님의 주권을 믿되, 마치 모든 것이 당신에게 달린 것처럼 일하라"는 웨슬리의 말이 당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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