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란 무엇인가?

예배의 의미 바로 알기

프롤로그

여러분은 매주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가실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여러분의 교회 정문 앞에 서서 이렇게 외친다면 어떻겠습니까?

"예배드리러 교회에 들어오는 여러분,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지난 한 주 동안 어떻게 사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직장에서 동료를 깎아내리거나 뒤에서 험담하신 적이 있습니까?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지 않고 남의 창작물이나 프로그램을 사용한 적이 있습니까? 작은 거짓말로 이익을 취하신 적은요? 내가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압박하신 적이 있습니까? 가정에서 배우자, 혹은 자녀의 마음을 상하게 한 적이 있습니까? 마음 속에 아직 용서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까? 하나님보다 성공, 돈, 인정, 오락, 안락함을 위해 마음을 쏟으며 사셨습니까? 도움이 필요한 이웃의 돌아보거나, 약한 사람을 배려하며 지내셨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지 않는다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헛수고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람의 말에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이 사람이 누구인지 마지막 부분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구원의 확신이 있으니 괜찮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너그럽게 용서해주실 겁니다?'


과연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예배란 무엇일까요......


1. 예배란 어떤 의미일까요?

단어 속에 담긴 뜻

우리말 예배(禮拜)는 '예를 갖추어 절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를 갖추어 엎드리는 행위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영어로는 worship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가치(worth)'와 '신분(ship)'이 합쳐진 말로, '가장 큰 가치를 드릴 만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라는 고백이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성경 원어로 보면 더 풍부해집니다

성경은 원래 히브리어(구약)와 헬라어(신약)로 쓰여 있는데, 이 두 언어에는 예배를 표현하는 단어가 여러 개 있습니다. 이 단어들을 알면 예배가 얼마나 풍성한 개념인지 느끼실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히브리어 단어들

첫 번째는 샤하입니다. '엎드리다', '굴복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구약성경에만 172번이나 등장하는 이 단어는, 예배의 핵심이 '하나님 앞에서 나를 낮추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두 번째는 아바드입니다. '섬기다', '일하다'는 뜻입니다. 예배는 특별한 시간에 드리는 의식만이 아니라, 종이 주인을 섬기듯 삶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임을 이 단어가 말해 줍니다.

세 번째는 샤라트입니다. '공적으로 섬기다'는 뜻으로,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예배를 가리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헬라어 단어들

첫 번째는 프로스퀴네오입니다. '입 맞추다', '엎드리다'는 뜻입니다. 옛날에 신하가 왕 앞에 엎드려 발에 입 맞추며 충성을 맹세하던 모습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두 번째는 라트류오입니다. 종이 주인을 섬기듯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 교회에서 목회자를 '주의 종'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 단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레이투르기아입니다. 오늘날 '예전(禮典)'이라는 단어, 그리고 영어 'liturgy'가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예배 의식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들을 종합하면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예배는 주일 한 시간의 행사가 아닙니다. 엎드림, 섬김, 공동체의 고백, 삶 전체가 담긴 행위입니다.


학자들은 뭐라고 정의했을까요?

예배를 연구한 학자들의 말을 들어 보면 예배의 의미가 더 잘 이해됩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핵심만 쉽게 풀어 보겠습니다.

헉스터블이라는 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 나누는 대화다." 예배가 일방통행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살아 있는 대화라는 것입니다.

지글러라는 학자는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에 대한 우리의 정성 어린 응답이다." 예배는 내가 먼저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마틴이라는 학자는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우리 삶의 기준이 되는 방식으로 드리는 축제다." 예배가 끝나면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월요일의 내 삶을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예배는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요?

구약시대 — 제사에서 말씀으로

처음에는 제사로 드렸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예배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입니다(창세기 4장). 이후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제사를 드렸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려 했습니다. 이 시대의 예배는 짐승을 잡아 불에 태워 드리는 '번제'가 중심이었습니다. 피를 흘리는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분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 시대에는 성막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를 걷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이라는 예배 장소를 만들게 하셨습니다(출애굽기 25-31장). 그리고 어떻게 예배할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 다섯 가지 제사의 방식을 정해 주신 것입니다. 이 제사들은 모두 한 가지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입니다.

왕국 시대에는 성전이 생겼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면서, 예배는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시편으로 찬양을 드렸고, 악기를 연주하는 찬양단만 4천 명이었다고 합니다(역대상 23:5).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이라는 세 가지 큰 절기도 중요하게 지켜졌습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회당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면서 성전에서 드리던 제사가 불가능해졌습니다. 이때 생긴 것이 '회당(시나고그)'입니다. 제사 대신 성경을 읽고 가르치는 것이 예배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제사장 대신 랍비가 등장했습니다. 이 회당 예배의 형식은 훗날 초대교회 예배의 모델이 됩니다.


예수님은 예배를 어떻게 보셨을까요?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사셨기 때문에, 성전 예배와 회당 예배에 모두 참석하셨습니다. 그러나 형식만 남은 예배에 대해서는 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배에 대해 가장 핵심적으로 말씀하신 장면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묻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했는데, 당신네는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하잖아요? 어디서 드리는 게 맞는 건가요?"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4)

예배는 장소 문제가 아닙니다. 이 산도, 저 도시도 아닙니다. 예배의 핵심은 '어디서'가 아니라 '어떻게', 그리고 '누구 앞에서'입니다. 성령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 위에서 드리는 것이 참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더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예배자들을 찾으신다." 예배는 내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예배 — 가장 살아 있던 시절

초대교회 사람들의 예배는 지금 우리의 예배와 많이 달랐습니다.

우선 장소가 달랐습니다. 교회 건물이 생긴 건 2세기 이후의 일입니다. 그 전까지는 집에서 모였습니다. 둥글게 둘러앉아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예배했습니다.

내용도 달랐습니다. 사도행전 2:42는 초대교회 예배의 핵심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말씀을 배우고, 함께 나누고, 성찬을 나누고, 기도하는 것, 이 네 가지가 전부였습니다.

참여 방식도 달랐습니다. 고린도전서 14:26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각각'이 핵심입니다. 특정한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무언가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임을 '예배'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왜였을까요? 그들에게는 삶 전체가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일요일 한 시간의 모임이 예배의 전부가 아니라, 그 모임은 삶의 예배 가운데 한 부분이었던 것입니다.


3. 예배가 가져야 할 특성들

예배는 아무렇게나 드려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배에는 분명한 특징들이 있습니다. 어렵지 않게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배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예배가 '내가 은혜를 받는 것', '기분이 좋아지는 것', '내 필요가 채워지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물론 예배 후에 위로와 힘을 얻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그러나 예배의 목적 자체가 '나'여서는 안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둘째, 예배는 예수님을 중심에 놓아야 합니다.

기독교 예배가 다른 종교의 의식과 다른 가장 큰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예배의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죄 용서의 감사를, 부활 앞에서 승리의 기쁨을 경험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셋째, 예배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형식과 순서도 중요하지만, 성령님이 살아 역사하시지 않는 예배는 껍데기만 남은 예배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하셨을 때의 '영'이 바로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넷째, 예배는 함께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배는 혼자만의 종교 행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가 함께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 공동체인 교회가 중요합니다.

다섯째, 예배는 말씀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없는 예배는 방향을 잃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여섯째, 예배는 삶 속에서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특성일지도 모릅니다.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가 끝났다고 예배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일터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예배입니다.


4. 예배의 핵심과 내용

예배에서 우리는 무엇을 경험해야 할까요?

예배는 크게 세 가지 흐름을 가집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경 봉독, 설교, 축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둘째, 우리가 하나님께 응답합니다. 찬양, 기도, 헌금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셋째, 결단하고 나갑니다. 예배가 끝난 후 삶으로 돌아가서 그 예배의 내용을 살아냅니다.

이 세 흐름이 살아 있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입니다.


예배에는 어떤 요소들이 포함되나요?

전통적으로 교회의 예배에는 네 가지 핵심 요소가 있습니다.

말씀 선포, 즉 설교는 예배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입니다. 종교 개혁 시대에 개혁자들이 '설교 없이 구원 없다'고 했을 만큼 중요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입니다. 감사기도, 회개기도, 간구기도,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기도 등이 모두 포함됩니다.

성례전, 즉 세례와 성찬은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의식입니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경험하는 예배입니다.

헌금은 단순히 돈을 내는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내 삶을 드리겠다는 고백의 표현입니다.


예배의 형태는 교단마다 다릅니다

교회마다 예배의 스타일이 다른 것을 경험하신 적 있으신가요? 크게 세 가지 방향이 있습니다.

성찬 중심의 예배는 주로 동방 교회(천주교 포함)에서 드립니다. 성찬식을 예배의 절정으로 여기며 다른 모든 것을 그 준비로 봅니다.

설교 중심의 예배는 대부분의 개신교가 따르는 형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설교를 예배의 핵심으로 봅니다.

성령 중심의 예배는 순서와 형식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성령님의 역사를 더 중요시하는 형태입니다. 오순절 교단이나 은사주의 교회들이 이 방향을 따릅니다.

어떤 형태가 맞고 틀리다기보다, 각각의 형태에 담긴 신학적 강조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5. 우리의 예배, 무엇이 문제일까요?

지금까지 예배가 무엇인지, 어떤 역사를 걸어왔는지, 어떤 특성을 가져야 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솔직하게 오늘 우리의 예배를 돌아볼 차례입니다.

예배가 성직자들의 전유물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공인 종교가 된 4세기 이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작은 가정 모임이 거대한 성당 건물로 바뀌었고, 모두가 함께 참여하던 예배는 성직자가 주도하고 나머지는 구경하는 형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예배가 라틴어로 진행되어 일반 신자들은 내용을 이해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예배는 '보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16세기 종교 개혁 때 루터는 이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치과 의사가 충치를 치료하는 것도, 목사가 설교하는 것과 똑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라는 '만인 제사장론'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실제 예배의 구조는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구조가 오늘까지 이어졌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교회 예배를 떠올려 보십시오. 목사님은 앞에서 말하고, 성도들은 뒤에서 듣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이었을까요?


예배가 일요일 한 시간으로 쪼그라들었습니다

현대 교회에서 예배는 '일요일, 교회 건물, 정해진 순서'로 완전히 정의되어 버렸습니다. 그 한 시간이 끝나면 예배도 끝입니다.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 하나님과의 시간은 끝이 나고, 다시 '내 삶'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게 말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 로마서 12:1

구약에서는 죽은 동물을 제단에 올렸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드려야 할 제물은 '살아 있는 나 자신'입니다. 몸 전체, 삶 전체를 드리는 것이 예배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예배는 일주일에 한 시간의 종교 활동이 아니라, 하루 24시간, 일주일 내내 지속되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 사실을 놓쳐 버린 결과가 무엇인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주일에는 경건하고 월요일에는 세속적인 이중생활, "나는 주일 예배 드리니 괜찮아"라는 안도감, 예배 참석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리는 형식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배가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예배를 연구한 한 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약 시대의 예배는 몇 사람이 무대에서 공연하고 나머지는 관객이 되는 연극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앞에는 무대가 있고, 조명이 있고, 음향 시스템이 있습니다. 찬양팀은 공연을 하고, 회중은 박수를 칩니다. 설교자는 강단에 서고, 성도들은 들으며 평가합니다. '오늘 은혜 받았다', '오늘 설교 별로였다.'

예배가 공연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물론 좋은 음향과 조명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구조입니다. 의자가 모두 한 방향을 향하고, 소수가 모든 것을 주도하고, 나머지는 앉아서 소비하는 구조. 이 구조 자체가 신학적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6.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필자가 프롤로그에 등장시킨 사람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염두에 두고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오늘날의 상황으로 변형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대백성의 형식주의적 예배를 이미 엄하게 경고했습니다(예레미야 7:2-4, 9-10).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예레미야 7:2-4)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예레미야 7:9-10)


예배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유다 백성들은 성전 출입 행위 자체가 자신들을 의롭게 하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으나,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7:3)는 것이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예배임을 의미한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것에 대해, 삶 전체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삶입니다.

예배는 의식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예배는 일요일이 아니라 매일입니다.

예배는 소수의 독점이 아니라 모두의 참여입니다.


삶의 예배는 공예배 보다 선행됩니다

공동체가 함께 모이는 주일 예배(공예배)는 분명히 중요합니다. 그 자리에서 말씀을 듣고, 함께 찬양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성찬을 나누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보면 삶의 예배가 공예배보다 선행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았는지 여러 가지 설명이 있었지만, 성경을 보면 제물보다 사람이 먼저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창세기 4:4)

하나님께서 우선적으로 보는 것은 사람이지 제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상의 모습을 주목하신 것입니다. 예배 이전의 삶을 먼저 보십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이 장을 마무리하면서,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정답을 찾는 질문이 아닙니다. 솔직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질문들입니다.

나는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배당에 출석'하고 있습니까?

나는 교회에서만 하나님을 섬깁니까, 아니면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하나님을 섬깁니까?

나는 예배의 소비자입니까, 아니면 예배의 참여자입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예배당이 아닙니다. 더 화려한 음향 시스템이 아닙니다. 더 유명한 강사가 아닙니다. 필요한 것은 단 하나입니다.

예배가 무엇인지를 다시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한복음 4:24)


에필로그

좋은 코치는 훈련실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선수가 실제 경기에서 어떻게 뛰었는지를 함께 보고, 무엇이 부족했는지를 찾아내며, 다음 경기를 위해 더 나은 훈련을 설계합니다. 아무리 열정적으로 가르쳤다 해도, 선수가 경기장에서 어떤 성적을 거두었는지에 무관심한 코치를 우리는 좋은 코치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성도를 군사와 운동선수에 비유합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디모데후서 2:3)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고린도전서 9:24)

군사는 전쟁터에서 싸우기 위해 훈련받습니다. 운동선수는 경기장에서 뛰기 위해 땀을 흘립니다. 훈련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훈련은 언제나 실전을 향해 있습니다.

성도의 실전은 어디입니까? 바로 삶의 현장입니다. 월요일 아침의 직장, 매일의 가정, 관계와 선택이 이루어지는 일상의 모든 자리가 영적 전투의 현장이며 믿음의 경주가 펼쳐지는 경기장입니다.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하며." (히브리서 12:1)


말씀을 선포하는 것만큼, 그 말씀이 삶의 현장에서 실제로 살아지고 있는지를 함께 살피고 돌보는 것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성도가 자신이 선수이며 군사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은 치명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선수가 경기장에서 잘 뛰고 있는지에 무관심한 코치가 제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없듯이, 성도가 삶이라는 경기장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무관심한 목회도 제 역할을 다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설교단에서 선포된 말씀이 월요일의 삶을 바꾸는 것, 그것이 목회의 완성이며 예배의 열매입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야고보서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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