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성수 바로 보기
"주일에 교회 안 가면 안 되나요?"
"목사님, 솔직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요즘 주일 아침이 너무 힘들어요."
30대 직장인 성도가 상담실에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토요일 밤까지 야근하고 나면 몸이 천근만근인데, 일요일 아침 9시 예배에 나가려면 7시에 일어나야 하거든요. 솔직히 주일만 되면 '오늘 하루만 쉬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생각을 하는 제가 믿음이 없는 건가요?"
이 질문은 비단 한 사람만의 고민이 아닙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마음 한편에 품고 있는,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솔직한 갈등입니다.
"주일에 꼭 교회 가야만 하나요?"
"온라인 예배로 대체하면 안 되나요?"
"주일에 일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하나요?"
한편, 정반대의 목소리도 들립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지 변함없는 율례입니다"
"주일에 식당에 가서 외식하는 것도 죄 아닌가요?"
"주일 오후에 영화 보러 가는 것도 주일성수를 어기는 건가요?"
똑같은 '주일성수'를 놓고, 어떤 이에게는 너무 무거운 짐으로, 어떤 이에게는 지나치게 엄격한 율법으로 느껴지는 이 현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현대 사회는 '피로 사회'라고 불립니다. 24시간 꺼지지 않는 도시의 불빛, 스마트폰을 통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그리고 끊임없는 경쟁.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기독교의 오랜 전통인 '주일성수'는 때때로 구시대의 유물처럼, 혹은 현실을 모르는 율법적인 족쇄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과연 주일성수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어떤 성도들은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 사이의 관계에 대해 혼란스러워합니다.
필자도 처음에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는 이 부분을 이해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명시된 안식일은 분명히 제칠일, 즉 오늘날의 토요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회는 왜 토요일이 아닌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게 되었을까요?
이 전환을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날짜 변경의 사실을 아는 것을 넘어섭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갖는 혁명적 의미를 파악하는 열쇠입니다.
구약의 안식일: 창조와 구속의 기념일
구약 성경에서 안식일은 두 가지 핵심적인 신학적 기반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첫째, 창조의 기념입니다.
창세기 2장 1-3절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후 일곱째 날에 쉬셨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은 피곤해서 쉬신 것이 아니라, 모든 창조 사역이 완성되었기에 쉬셨습니다.
이 '쉼'을 통해 하나님은 친히 일과 쉼의 거룩한 패턴을 우리에게 모델로 보여주셨고,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여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십계명의 제4계명은 이를 근거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합니다.
둘째, 구속의 기념입니다.
신명기 5장 15절은 안식일의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제시합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즉, 안식일은 끝없는 노동을 강요하던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구속'의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
쉼 없는 바로의 체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기억하는 날이었기에, 안식일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의 표징'(출애굽기 31:13)이 되었습니다.
요약하면, 구약의 안식일은 '옛 창조'의 완성을 기념하고, 노예로부터의 해방을 기억하는 날이었습니다.
신약의 주일: 새 창조의 시작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거대한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며(마태복음 12:8), 율법의 완성이십니다.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복음서는 한 목소리로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 즉 일요일 새벽에 사망 권세를 깨고 부활하셨다고 증언합니다(마가복음 16:9).
이 부활은 단순히 한 개인의 소생이 아니라, 죄로 인해 타락한 옛 창조가 끝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New Creation)'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우주적 사건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전환: '주의 날'의 확립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점으로 모임의 날을 자연스럽게 안식 후 첫날로 옮겨갔습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초대 교회의 예배 실천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성경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사도행전 20:7) → 부활하신 주님을 기념하는 성찬 중심의 예배가 주일의 핵심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고린도전서 16:2) → 정기적인 주일 예배가 있었으며, 구제를 위한 헌금도 함께 이루어졌음을 시사합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요한계시록 1:10) → 1세기 말에 이미 '주님께 속한 날'이라는 의미의 '주의 날' 개념이 정착되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입니다.
중요한 점은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일요일 휴업령(A.D. 321)이나 특정 공의회의 결정 이전에, 예수님의 부활을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형성된 초대 교회의 신앙고백적 실천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주일은 단순히 날짜만 바뀐 것이 아니라, 구약의 안식일이라는 '그림자'가 그리스도라는 '실체'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고 완성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깊은 영적 여정입니다. 주일성수의 핵심은 날짜 준수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참된 안식의 실체를 누리는 데 있습니다.
안식일의 완성이신 그리스도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장 16-17절에서 이 관계를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바울의 선언은 명쾌합니다. 구약의 안식일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였습니다. 이제 그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므로, 우리는 더 이상 그림자인 율법 조항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마가복음 2:28)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안식일을 폐지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율법 조항에 갇혀 본질을 잃어버린 안식일의 원래 목적, 즉 자비와 생명, 그리고 진정한 쉼을 회복시키는 분으로서의 권위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허용하시고,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심으로써 안식일이 사람을 억압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존재함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이 초대는 진정한 안식이 특정 날을 지키는 율법적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영혼의 쉼을 누리는 것임을 역설합니다. 주일은 바로 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안식을 매주 경험하고 훈련하는 특별한 시간입니다.
주일성수의 세 가지 차원
성경이 말하는 주일성수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주일에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것 이상의 깊은 영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1) 하나님 중심의 예배 (Worship): 언약 관계의 확인
주일성수의 가장 핵심은 예배입니다. 이사야 58장 13-14절은 안식일을 "여호와의 성일"이라 부르며,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약속합니다.
이는 주일이 '나의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날'임을 인정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되심을 고백하는 훈련입니다. 우리는 일주일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남은 엿새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감을 고백합니다. 주일성수는 피조물이 창조주께, 구원받은 자가 구원자께 드리는 마땅한 경배의 행위입니다.
2) 거룩한 안식 (Holy Rest): 멈춤과 신뢰
성경적 안식(Sabbath)은 히브리어로 '샤바트와 누아흐라는 단어가 있는데, 히브리어에 나타난 두 가지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샤바트: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세기 2:2).
이 단어는 '일을 멈추다', '중단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모든 생산적인 활동과 노동으로부터의 의도적인 중지를 뜻합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시고 피곤해서 쉬신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단어의 의미를 고려할 때 하나님께서 창조를 완성하시고, 일곱째 날은 다른 날과 구별(거룩)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아흐: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출애굽기 20:11).
동일한 창조사역을 언급하면서 출애굽기에서는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거친 바람이 잦아들고 배가 항구에 안착하다(settle)는 뜻이 있습니다. 노예생활로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노동 중단(샤바트)을 넘어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활동을 멈추는 것을 넘어, 사랑하는 이와 함께 평안히 머무는 관계적이고 인격적인 쉼을 의미합니다.
이 두 개념을 종합하면 주일성수의 온전한 그림이 그려집니다. 주일은 단순히 일하지 않는 것(샤바트)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샤바트는 누아흐를 위한 전제 조건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노력을 멈춤(샤바트)으로써 거룩한 공간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 주일의 참된 목표인 하나님과의 관계적 임재 안에 거하는 것(누아흐)을 경험하게 됩니다.
출애굽기 16장에서 하나님은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지 못하게 하셨지만, 전날 갑절의 양식을 주셨습니다. 주일성수는 "내가 일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나를 먹이신다"는 전적인 신뢰의 표현입니다. 세상은 "멈추면 도태된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멈추어야 하나님을 본다"고 가르칩니다.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 과학이 증명한 안식의 원리
우리는 흔히 '안식'이나 '쉼'을 게으름이나 생산성의 중단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하지만 현대 뇌과학은 이러한 통념이 틀렸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2001년 미국 워싱턴대의 신경과학자 마커스 라이클 박사는 fMRI 실험을 통해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쉴 때, 뇌가 멈추기는커녕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MN)'라는 특정 부위가 활발하게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뇌는 쉴 때 비로소 외부 정보의 홍수에서 벗어나, 흩어진 기억을 정리하고 자아를 성찰하며 창의적인 연결을 만들어냅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안식의 원리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안식은 무의미한 정지가 아닙니다. 세상의 소음을 차단하고 하나님 안에서 잠잠히 머물 때, 우리의 영혼은 비로소 질서를 되찾고 회복되며 새로운 창조의 에너지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일성수는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디폴트 모드'를 켜서 헝클어진 내면을 하나님 안에서 재부팅(Rebooting)하는 가장 적극적인 생산의 시간인 것입니다.
3) 사랑과 교제 (Fellowship): 선을 행하는 날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태복음 12:12).
주일성수는 나 혼자 골방에서 쉬는 날이 아닙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브리서 10:25)
주일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 떡을 떼며(성찬),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고, 세상에서 상처 입은 영혼들을 위로하는 공동체적 축제의 날입니다.
결코 멈추지 않는 '상업주의와 소비주의 사회', 끊임없는 성과와 생산성을 요구하는 '성과주의 문화'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급변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주일성수를 적용해야 할까요?
형식주의와 율법주의의 탈피
과거 한국 교회의 전통처럼 "돈을 쓰지 않고, 먼 거리를 여행하지 않는 것"과 같은 율법적 규제는 현대 사회에서 재해석이 필요합니다. 현대적 주일성수는 "무엇을 금지하는가"보다 "무엇을 지향하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단순히 교회 건물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주일을 성수한 것이 아닙니다. 몸은 예배당에 있지만 마음은 주식 시장이나 업무 걱정에 가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주일성수가 아닙니다. 반면, 불가피한 직업(의료, 소방, 치안 등 필수직군)으로 인해 주일 예배를 정해진 시간에 드리지 못하더라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다른 시간을 구별하여 예배한다면 하나님은 그 중심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저항으로서의 주일성수: 현대판 '출애굽'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은 현대 사회를 끝없는 생산과 소비를 요구하는 고대 이집트의 '바로의 체제'에 비유합니다. 바로의 체제는 사람들에게 '너는 네가 생산하는 만큼의 가치가 있다'라고 속삭이며, 우리를 끊임없는 불안과 탐욕의 노예로 만듭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일성수는 단순한 휴식이 아닌, 이 시대의 바로가 강요하는 불안과 탐욕의 우상들로부터의 의도적인 해방 선언입니다. 우리는 주일에 일을 멈춤으로써, "나의 가치는 나의 일에 있지 않다"고 선언하며 시장의 우상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킵니다. 소비를 멈춤으로써, "나의 만족은 물질에 있지 않다"고 고백합니다.
온전한 주일 성수를 위한 제안
주일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실천이 필요합니다. 다음은 주일성수가 율법적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참여하는 적극적인 시간임을 보여주는 네 가지 실천 방안입니다.
1) 샤바트(Ceasing): 일상의 의도적 중단
이것은 육체적 노동을 멈추는 것을 넘어섭니다. 평일에 하던 일을 의도적으로 중단하고, 한 주간 우리를 지배했던 걱정과 불안, 성취에 대한 압박감,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으로부터 의도적으로 벗어나는 훈련입니다.
특히 현대인에게 주일성수의 가장 큰 도전은 '디지털로부터의 안식'일지 모릅니다. 스마트폰과 인터넷 매체를 잠시 내려놓는 것(Digital Detox)이야말로 현대판 주일성수의 첫 단계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지킬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한 참된 쉼으로 들어갈 준비가 됩니다.
2) 누아흐(Resting): 하나님 안에서의 재충전
육체의 피로를 푸는 것뿐만 아니라, 정신과 감정, 영혼의 전인격적인 쉼을 추구하는 시간입니다. 예배와 기도, 말씀 묵상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합니다. 분주함 속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말씀을 통해 듣고, 조용한 기도 속에서 영적인 재충전을 얻으며 그분의 임재가 주는 평안을 누립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 영혼이 충만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일은 일주일 동안 소진된 에너지를 단순히 잠으로 채우는 날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을 통해 영혼이 소생함을 얻는 날이어야 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을 경험해야 합니다.
3) 교제(Connect):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함께하기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을 만나주시지만, 우리는 공동체를 통해서도 그분의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성경은 명확하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하십니다(고린도전서 12:27).
또한 공동체로서의 연합과 성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에베소서 4:16)
예수님께서 모든 계명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셨듯이,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만큼 중요합니다.
따라서 개인과 하나님의 일대일 관계만큼 성도 간의 교제가 중요합니다.
가족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나누며, 연약한 지체를 돌아보는 것은 성도로서 마땅한 삶입니다.
4) 파송(Send): 세상으로 흩어지는 예배
마지막으로, 주일성수는 월요일을 위한 준비입니다. 주일에 교회 안에 모여(Gathered Church) 은혜를 받았다면, 이제 세상으로 흩어져(Scattered Church) 삶의 예배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주일에 받은 말씀과 은혜가 직장과 가정, 학교에서의 삶을 거룩하게 만드는 동력이 될 때, 주일성수는 비로소 완성됩니다.
이는 우리가 주유소에 가서 자동차에 주유하고 다시 도로로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가득 채운 뒤 그곳에 주차해 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주일에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뒤, 다시 세상이라는 도로로 힘차게 나아가야 합니다.
디지털 시대와 온전한 예배의 회복
팬데믹 이후 온라인 예배가 보편화되었습니다. 이는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도구가 되었지만, 동시에 '편의주의적 신앙'을 낳기도 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와 교제하시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점을 생각할 때, 기독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성도들 사이의 교제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생활하게 될 날을 떠울려 보십시오. 그 곳에서도 교제를 피해서 혼자서 생활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혹자는 천국과 지옥을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둠 속에서 생활하던 사람이 천국의 광채를 괴로워하여 하나님을 피해 지옥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지옥에 대해서는 다음에 구체적으로 다루겠습니다).
따라서 가능한 한 성도들이 얼굴을 맞대고 교제하는 공동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이 땅에서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삶을 연습해야 합니다.
아울러 현대적 의미의 주일성수는 편리함을 넘어선 '수고로움의 헌신'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몸 중에 한 부분이 기능을 멈추면 어떻게 될까요?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담당해야 할 역할을 회피한다면, 공동체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의 영적인 건강을 위해서라도 함께 모여 공동제 안에서 우리의 역할을 찾아야 합니다.
만일 부득이하게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교제가 없는 온라인 예배가 원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성도가 주일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의사, 간호사, 경찰, 소방관, 군인, 대중교통 종사자 등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직업에 종사하는 분들은 주일에도 일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주일 성수를 해야 할까요?
신학적 근거: '부득이한 일'과 '자비의 일'
전통적인 장로교 신학의 표준 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1장 8항에서도 주일성수의 예외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부득이한 일(Works of Necessity): 생명 유지, 사회 안전, 공공질서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일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12:5).
이는 예배를 돕거나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노동은 안식일 규례에 저촉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자비의 일(Works of Mercy): 고통받는 이웃을 돕고 구제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며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태복음 12:12)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천적 적용 지침
단순히 "일해도 된다"는 허용을 넘어, 어떻게 그 상황 속에서 거룩성을 지킬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1) '시간'의 성수: 주일 대예배(오전 11시) 참석이 어렵다면, 새벽 예배(1부)나 저녁 예배, 혹은 수요 예배 등을 통해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는 공적 예배의 시간을 확보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뒤따르는 수고와 불편을 감수하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 청년 바보 의사의 주인공인 안수현 씨는 의대생 시절과 바쁜 인턴·레지던트 기간에도 주일 예배와 성경 공부 리더 활동을 쉬지 않았습니다. 이를 위해 동료들과 당직을 바꿔서라도 반드시 예배의 자리를 지켰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단순히 자신의 편의를 위해 근무를 바꾼 것이 아니라, 평소 동료들의 일을 대신해 주거나 어려운 상황을 배려해 주는 삶을 살았기에 동료들도 그의 주일 성수를 흔쾌히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2) '공간'의 성수: 주일에 일터에 있는 것을 죄책감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그곳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교지로 인식해야 합니다.
의사는 환자를 돌봄으로, 경찰은 시민을 지킴으로, 식당 주인은 손님에게 정성스러운 음식을 대접함으로 "주께 하듯"(골로새서 3:23) 섬긴다면, 그 노동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산 제사)가 될 수 있습니다. 가능하면 일하는 틈틈이 짧은 기도나 말씀을 묵상하며, 나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음을 수시로 확인합니다.
3) '안식'의 이동: 목회자들이 주일에 사역하고 월요일에 쉬는 것처럼, 주일에 일하는 성도들은 평일 중 하루(예: 월요일)를 정해 온전히 쉬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나만의 안식일'을 가져야 합니다. 쉼 없이 7일을 달리는 것은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므로, 반드시 뇌와 영혼이 쉬는 날을 확보해야 합니다.
필자는 학창시절에 텔레비전의 한 프로그램에서 아프리카의 '누(Wildebeest)' 떼가 이동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거대한 뿔을 가진 이 짐승들은 수만 마리가 떼를 지어 지축을 울리며 달립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파른 절벽을 만나게 됩니다. 맨 앞에 선 무리는 위험을 감지하고 멈추려 하지만, 뒤에서 밀어닥치는 무리들의 거대한 압력에 떠밀려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렇게 많은 무리들이 떨어지고 난 뒤에야 누 떼들이 방향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현대인들의 삶은 이 누 떼와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혹은 불안감 때문에 쉼 없이 질주합니다. 하지만 그 끝이 벼랑인지 안식처인지 확인할 겨를조차 없습니다.
여기서 '주일성수'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납니다. 주일은 단순히 예배를 드리는 날을 넘어, 질주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방향을 확인하는 날입니다. 세상의 속도에 떠밀려 벼랑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거룩한 멈춤'이라는 안전장치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일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성수는 우리를 옭아매는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세상의 노예가 되지 않게 지켜주는 영적 방파제이며,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고 새로운 한 주를 살아갈 하늘의 힘을 공급하는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멈출 수 없는 세상의 흐름 속에서도, 매주 주일마다 하나님 앞에 우뚝 서서 "나는 여기서 멈춥니다. 나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점검하기]
1. 주일성수라는 단어와 함께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2. 이 글을 읽고 깊이 와닿았던 부분은 무엇인가?
3. 주일성수와 관련하여 앞으로 어떤 부분을 실천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