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대영 May 24. 2024

말상처

몇 년 전, 한 대행사에서 만든 어린이 권리에 대한 CSR 캠페인이 주목 받은 적이 있다.

어른들의 언어 폭력도 아이들에게는 큰 상처를 준다는 것이 캠페인의 주요 내용이었다.


광고대행사에서 일하다보면 광고주로부터의 말 때문에 상처 받는 직원들을 많이 본다.

그나마 임원 타이틀과 나이 때문에 대놓고 폭언을 받은 적은 없지만 나 역시 상처 받는 일이 없는 건 아니다.

광고주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는 우리는 타인의 언어로 부터 상처 받을 때가 있다.


말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개인적 노하우는 말이 상처가 될지, 약이 될지를 구분하는 기준을 만드는 것이다.

말은 누구에게 듣느냐에 따라 상처만 남을지, 처음엔 아프지만 결국 굳은 살이 되어 도움이 될지로 나뉜다.

나는 여기서 '누구'를 직급이나 나이에 따라 나누지 않는다.

나의 '누구'에 대한 기준은 이렇다.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인가? 그렇다 or 아니다.

이 사람은 나의 성장에 관심을 갖고 있는가? 그렇다 or 아니다.

이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인가? 그렇다 or 아니다.

이 사람은 존경할 만한 능력자인가? 그렇다 or 아니다.


이 기준에서 '그렇다'에 속한 사람의 아픈 말은 최대한 수용하려고 노력한다. 처음엔 아프지만 아픔이 살짝 가라 앉는 타이밍에 그 사람의 말을 곱씹어 본다.

하지만 위의 기준에서 '아니다'에 가까운 사람의 말은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를 외치며 최대한 빠르게 잊어버린다.

그 중 마지막 질문 '이 사람은 내가 존경할 만한 능력자인가?'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을 때, '능력이 없으니 니가 나를 그 정도 밖에 평가하지 못하지'라고 위안 삼는다.

그리고 꽤 많은 케이스에서 위 네 가지 질문에서 '아니다'에 가까운 사람이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상처를 준다.위의 질문에서 '그렇다'에 가까운 사람은 절대 사람을 그런 방식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말 상처 중에 가장 심각한 타격을 주는 건, 나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케이스다. 내가 한 일, 나의 생각들이 부정당할 때 그 상처는 꽤 크다. 누군가 나에게 그런 종류의 말 상처를 줄 때 나는 예전 유시민씨가 한 이야기를 떠올린다. 어떤 책에서 봤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맥락은 이런 것이었다.


"사람들이 말로 나를 공격할 수 있지만 결국 내가 그렇게 되지 않는 이상 누구도 나를 실제로 그렇게 만들 수는 없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무능력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내가 진짜 무능력한 것은 아니다.

말 상처가 진짜 말 상처가 되는 건, 내가 스스로 그 말에 합당한 사람이었을 때 가능하다. 여러 사람으로 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 데 그와 반대되는 말을 한다면 그건 크게 신경쓸 필요가 없는 말이다.

스스로가 무능력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무능력하지 않은 게 정답이다. 남의 평가 보다 평소 스스로의 객관화된 평가를 갖고 살아가면 말도 안되는 남들의 평가로 부터 조금은 덜 상처 받을 수 있다.


ps 예전 정신 상담을 받을 때, 제가 뭔가 부족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겠죠? 라고 말하자 의사는 나에게 그런 생각 금물이다. 마음의 상처에도 밴드를 붙여줘야 한다며 인형 하나를 주고 지금 내가 힘들게 한 상대를 정하고 가위로 자르라고 하셨다. 가슴이 후련했다.




작가의 이전글 질보다 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