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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영 Aug 15. 2024

내가 다시 광고주로 간다면

"전 이제 대기업 생활은 안하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제안 고맙습니다만 거절할게요"


광고 대행사 생활 3년차 즈음인가 아직 내리지 않았던 이력서 때문이었는지, 마케팅 잘하기로 유명했던 카드회사의 임원자리 제안이 왔다. 지금의 회사를 내 커리어의 마지막 회사라 생각했기 때문에 미련 없이 거절을 했다. 그 뒤로 부터 몇 년의 시간이 흐르며 가끔 다시 광고주로 갈까? 하는 생각이 불쑥 기어오를 때가 없는 건 아니었다.




여러 업체와 경쟁을 통해 2년간의 대행사로 선정되어 일을 했던 회사가 있다.

조직의 장들이 교체되는 내홍을 겪으며 새로 부임한 팀장은 새로운 대행사를 끌어드렸다. 짧은 준비 기간에 더 좋은 광고 시안 보고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했다. 새로운 팀장의 편에 서본다면 이해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대행 계약도 체결되지 않은 새로운 대행사와 경쟁PT를 하게 되었다.

새로운 팀장은 새로운 회사의 광고를 선택했다. 의사결정자의 선택을 핑계대었으나 사실 관계는 확인할 길도 없었다. 새로운 술을 새 부대에 담고 싶은 마음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광고는 새로운 대행사가 제안한 컨셉은 온데 간데 없었고 우리가 제안했던 컨셉이 살짝 말만 바뀐 채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100억이라는 예산은 광고 대행사들이 군침을 흘릴만큼 매력적인 돈이다. 조각투자 스타트업의 경쟁 비딩은 당연히 경쟁이 치열했다.

10개 넘는 회사들이 수주전에 참가했다. 모두가 간절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경쟁비딩에 임했고 결과는 수주 성공이었다. 내부 사정이 있었겠으나 이 회사는납득될 수 없는 이유를 들며 어느날 해당 비용을 집행할 수 없음을 고지했다. 약속을 어긴 광고주로 인해 회사는 그 해 역대급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그런 결정을 한 새 팀장은 짧은 시간 안에 퇴사를 했지만 시간이 흐른 뒤 해당 회사는 우리에게 다시 대행을 해줄 수 없냐는 연락을 해왔다.




오랜 시간 광고주로 있다보니 광고대행사에서 일어나는 온갖 비상식과 불의의 난무를 직접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광고대행사에서는 적지 않게 그런 일들을 겪는다. 모든 일을 온몸으로 막아내야 하는 부문장이어서 고통이훨씬 큰 탓인지 그럴 때 마다 광고 업에 회의가 든다.


이런 일을 겪을 때 마다 광고주일 때의 나를 돌아본다.

나의 편의, 회사의 이익, 회사의 사정을 핑계 삼아 광고대행사들에게 부당한 요구나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한적이 없는지를 반성해보게 된다.


나는 다시 광고주로 갈 생각이 없지만 만약 광고주로 간다면 이것만은 지켜야겠다는 생각들이 있다.

나의 후배들이 광고주 생활을 하게 된다면 이런 나의 생각들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광고는 신뢰의 업이다.

약속한 것을 지켜야 한다. 경쟁 비딩을 통해 수주를 하는 것은 정당한 절차로 계약을 맺는 과정이다. 광고대행사는 미래의 수익을 예상하고 팀을 세팅한다. 팀을 세팅하고 업무를 진행하는 것만으로 인건비등의 비용이 발생한다. 뿐만 아니라 세팅된 팀은 미래의 수익을 감안하여 새로운 기회비용의 창출이 원천 차단된다. 쉽게 말하면 해당 팀은 새로운 수주의 기회가 와도 참여할 수 없다. 광고대행사에게 큰 귀책 사유가 없는 상황에서 광고주의 이익이나 편의만을 위해 계약되지 않은 다른 대행사를 쓰거나 쓸 돈을 의도적으로 쓰지 않는 등의 행위는 해서는 안된다.

광고주들이 경쟁 PT에 여러 대행사가 도전하도록 만드는 방법이 있다. 사용하지 않을 예산을 부풀려 공고를 내는 것이다. 광고주의 이런 행위는 사기다. '이 번엔 작은 예산이지만 잘 하면 더 기회를 주겠다'는 말도 지켜지지 않는 약속 중 하나다.


계약 내용을 이행 하지 않는 광고주를 법적 방법으로 조치하거나 부당함을 어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담보되지는 않았으나 앞으로의 올 수 있는 기회를날리고 싶지 않은 입장에서 쉬운 일이 아니다. 광고주는 이러한 초월적 지위와 권한이 을의 이익을 해치는데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전문성을 최대한 이끌어낸다.

광고주로 있을 때 나는 해당 산업 분야의 마케팅은 내가 최고라고 생각했다. 누구보다 많은 고민을 하니 나보다 깊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을 거라 자신했다.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했다. 산업 내부에 있으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된다. 어쩔 수 없이 소비자 보다 기업 입장에서 생각하게 된다. 또한 내가 속한 산업 카테고리에만 있다보니 다른 산업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트랜디한 기술 또는 방법론에 민감하지 못할 수 있다.

광고주가  해당 산업의 전문가는 맞다. 그래서 기업의 입장에서 확인된 전략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광고대행사는 산업 밖에서 좀 더 소비자의 눈으로 현상과 본질을 바라봐 줄 수 있다. 기업이 말하고 싶은 것과 소비자가 듣고 싶어하는 중간 지점의 간극을 좁혀준다. 소비자가 무엇에 열광하고 어떤 것을 싫어 하는지, 광고주가 속한 산업 밖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의견을 제시해준다. 당연히 크리에이티브한 아이디어로 소비자의 관심을 끌게 만드는 역량은광고주가 할 수 없는 고유의 전문 영역이다.

광고대행사의 전문성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방법은 그들이 책임있게 일 할 수 있도록 내가 모르는 영역을 믿고 맡기는 것이다.


장기 파트너십으로 전념하게 만든다.


광고주에 있으면서 매년 진행하는 PT는 공정의 차원해서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경쟁 비딩의 과정 없이 일을 주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일이라 생각했다.

광고대행사에 일을 해보니 장기적으로 한 회사의 일을하는 것에 많은 이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광고주들은 다른 대행사를 쓰면 또 다른 새로움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여러 대행사들을 경험하고 싶어한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반대로 한 회사와 오래 파트너십을 유지한다는 것은 대행사가 광고주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짐을 뜻한다. 회사에서 5년 째 대행을 하고 있는 한 광고주가 있다. 우리를 믿어 준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지만 속속들이 고민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도움을 줄 수 있다. 1년 짜리 단기 계약의 광고대행사는 해주지 못할 일들이 여럿 있다. 신제품의 상품 기획을 함께 고민하거나 신 사업등 새로운 먹거리를 고민할 때도 함께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다. 대행사입장에서의 단기 수익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으로 광고주의 회사가 성장해야 우리도 클 수 있다는 장기적 관점에서 일을 하게 된다. 해당 회사가 우리에게 연장 계약의 보상을 준 것은 실은 한 해 뿐이었다. 늘 경쟁 비딩을 했고 한 해는 다른 대행사가 대행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다년간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에 감사한다. 다시 광고주 생활을 한다면 공정함이나 새로움을 좇아 불필요한 매년의 비딩을 거치지 않을 것이다. 연장 계약이나 장기 계약이 오히려 광고주 입장에서 대행사가 우리를 위해 전념하게 만드는 확실한 보상이자 동인이 된다.

성과가 있다면 성과를 인정하고 갑과 을의 관계를 벗어나 장기간의 파트너십을 유지하는 것이 대행사를 우리와 같은 편에 서게 만들어 더 깊게 고민하고 도와줄 수 있도록 만드는 현명한 방법이다.


돈을 챙겨 준다.

다른 글에서 몇 차례 이야기 했지만 광고주 시절 광고대행사가 어떻게 돈을 버는지에 관심이 없었다. 미디어 수수료나 기획료를 알아서 챙기겠지... 그들에게 많은 일을 시킨 기억이 있지만 그 모든 일들이 실은 비용의 댓가를 치뤄야하는 일임을 광고대행사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광고대행사는 한 정된 인력으로 수익을 창출해야 한다. 따라서 돈이 되는 일에 인력을 투입할 수 밖에 없고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인력의 기회 비용을 투입해야 한다.

광고주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다. 예산을 깍으면 그것이 본인들의 실적이 될 것이라는 착각이다. 마케팅 부서의 KPI는 퀄러티 높은 크리에이티브나 마케팅 아이디어들이다. 예산을 깍으면 그만큼 퀄러티는 떨어지게 되어 있다. 투입할 수 있는 인력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비정상적인 예산 청구는 문제가 되겠지만 눈에 불을 켜고 예산을 깍는 일은 광고 실무자가 전념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적절한 댓가를 보장해주는 것이 광고대행사가 우리 일에 더 많은 공을 들이게 하는 방법이다.




광고주가 약속을 어기고 다른 대행사를 불러 일을 시킬 때, 과거 광고주 시절을 회상하며 그 결정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가 제안한 개념들이 모두 들어가 있는 광고물을 보자 처음으로 광고대행사의 업에 회의가 들었다. 회사가기 싫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망각의 힘으로 다시 그 회사의 광고를 열심히 만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경험들을 모두 챙겨 십 몇년 전으로 돌아가면 아마 좋은 광고주가 되어 광고대행사의역량을 훨 씬 더 잘 끌어냈을 것 같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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