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광고대행사에서 카피라이터를 해 본 적이 없지만 가끔 카피를 쓴다.
역시 나는 아트디렉터를 해본 적 없지만 아트에 대한 디렉션을 줄 때도 있다.
더욱이 나는 주니어 CD 등의 과정을 거쳐 정식 CD를 달아본 적 없으나 CD롤을 할 때도 있다.
누가 들으면 족보도 없이 잡다하게 일하는 광고대행사직원으로 볼 만하다.
하지만 전형적이지 않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있다는 것과 같다.
그런 생각으로 AE도 아니면서 광고주를 응대하고 AP가 아니면서 전략을 짜고 제작도 아니면서 제작을 총괄했다. 그렇게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대행사의 다양한 잡무를 했다.
당연, 광고대행사의 CD 밑에서 광고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CD의 전형성도 알지 못한다.
어느 대행사의 어떤 CD가 이렇다, 저렇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CD는 그 어디에도 없는 비 전형의 모습일 지도 모르겠다.
전형적으로 좋은 CD의 모습을 알지 못하지만 제작팀에 있는 후배들이 좋은 CD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에서 좋은 CD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이 생각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
1. CD는 리더다.
CD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줄임말이다. 보통 2~4명의 팀원을 이끌고 크리에이티브 솔루션 책임지는 사람이다. 펜타클에서도 대외적으로는 CD 호칭을 쓰게 하지만 내부에서는 팀장이라는 직책을 사용한다.
그렇게 한 이유는 CD는 디렉터라기보다 리더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CD와 팀장의 직함에서 오는 차이는 무엇일까?
크리에이티브를 책임지는 디렉터는 크리에이티브가 맨 앞에 있다. 팀장은 팀이 맨 앞에 있다.
나는 CD가 크리에이티브보다 팀을 중요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팀원 A가 생각한 아이디어를 킬 해야 할까? 살려야 할까?'
아이디어를 죽이고 살리는 일이 일상 다반사다. 고생해서 냈을 아이디어를 의견 몇 마디로 날리는 일은 매번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 괴로움을 무릅쓰고 냉정하게 아이디어를 버려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죽여야 할 아이디어를 살릴 때가 있다. 팀원의 고생을 생각하는 리더의 입장과 혹시 모를 가능성을 기대할 때 그런 경우들이 왕왕 발생한다.
나는 CD가 될 후배들이 '크리에이티브가 최우선이다'라는 생각을 잠시 접어두는 시간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CD나 광고주에게 버림받을 것을 각오하면서 팀원의 생각을 팔아보겠다는 노력도 CD에게 필요하다. 제작팀의 팀원들이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날갯짓도 못하고 자신의 아이디어가 흔적 없이 사라지는 일일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안이라도 팀원과 함께 들이밀고 팔아보려는 모습에서,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든 고치고 고쳐 심폐소생에 최선을 다해보는 그런 CD를 팀원들은 결국 믿고 따를 것이다.
2. 실력으로 말해야 한다.
CD는 자신의 팀을 이끄는 리더다. 모든 리더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CD 역시 팀원에게 실력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실력은 당연히 크리에이티브 능력이다. 팀원들의 아이디어에 대해 '이건 별로다' '이건 아니다' '다시 해라'는 지시는 멍청한 CD도 할 수 있다. 좋은 CD는 팀원의 개떡 같은 아이디어도 찰떡같은 아이디어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거지 같은 아이디어를 거지 같은 아이디어로 알아보는 눈은 실력 없는 CD에게도 있지만 보잘것없어 보이는 아이디어에서 아주 작게 빛나는 보석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은 아무에게나 있지 않다. 그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진짜 좋은 CD의 실력이라 생각한다. 팀원들의 허접한 아이디어에서 좋은 씨앗을 발견하는 능력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팀원들의 아이디어를 좋고 나쁨의 판단 기준으로 바라보지 않고 성장에 도움을 주고 싶다는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에서 출발하면 팀원들의 아이디어를 함부로 재단할 수 없고 어떻게든 함께 살려내고픈 생각이 앞설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정말 생각지 못한 크리에이티브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고백하자면 광고대행사에 온 초기에 나는 후배동료들의 아이디어를 딱 내 기준에서의 좋고 나쁨으로 판단했다. 싫은 아이디어는 별 피드백도 없이 '다음 아이디어'를 외친 경우도 숱하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더 설익었던 시절, 함께 했던 동료들은 아마 적지 않게 상처를 받았으리라. 미안하다.
오랜 회사 생활에서 적지 않게 보이는 리더들의 실수가 있다. 리더 대접을 받고 싶어서 위계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다. 위계의 힘자랑은 신경질을 내고 큰소리를 치는 것으로 표현된다. 리더들은 위계의 힘이 작용될 때 그것에 만족해하며 그 힘을 계속 쓰고 싶어 한다. 하지만 위계의 순종은 많은 경우 거짓의 순종이며 그 힘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팀원들을 이끄는 CD의 지속적인 힘은 오로지 크리에이티브 실력이다. 위기의 순간이 오면 발 벗고 나서서 자신의 아이디어까지 끌어내 팀을 위기에서 탈출시키고, 팀원들의 아이디어를 디벨롭해 더 멋지게 만들고도 그들의 아이디어로 인정해 주는 실력과 인성이 오래오래 진심으로 리더를 따르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3. 팀원을 제작의 도구로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광고대행사의 제작팀들이 모여 있는 오픈 채팅방이 있다.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가서 모두 읽어볼 수 없지만 제작팀 초년생들의 고민들을 엿볼 수 있어 유익하다. 제작팀원들은 TVCF 사이트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TVCF에는 CD부터 카피라이터와 아트디렉터 등 해당 광고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올라온다. CD는 어찌 보면 해당 광고의 크리에이티브를 대표하는 얼굴과도 같다.
만약 광고에도 지분이라는 것이 있다면 아마 CD의 지분율이 제일 높다고 생각할 것 같다.
그만큼 광고의 제작에서 CD는 중요하다. 그런데 CD 스스로가 자신의 중요성을 높이 생각하면 문제가 될 수 있다. 만약 CD가 광고 제작 과정에서 본인의 존재를 중요하게 생각하면 반대로 팀원들은 자신을 돋보이게 할 도구로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스포트라이트는 극장 무대의 한 부분이나 한 인물만을 특히 밝게 비추는 조명을 일겉는다. 리더는 조명을 받는 인물 보다 팀원을 밝혀주는 조명 자체로 빛나야 한디. 그래서 나는 오히려 CD는 무대 밖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팀원들의 좋은 아이디어를 잘 다듬고 갈아서 더 뾰족하게 만드는 숫돌 같은 역할. 때로는 그 칼을 들고 광고주와 소비자의 스윗 스팟을 찌르기 위해 최전선에 서는 첨병의 역할이 돼야 한다. 날카로운 칼이 주인공이라면, 그 주인공은 팀원들이 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날카로운 칼로 광고주 혹은 소비자를 찌르는 승리를 맛봤다면, 이 아이디어는 누구의 것으로부터 나왔다며 대신 자랑해 주고, 너의 아이디어가 회사를 살렸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 줘도 좋다.
팀원들에게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너희들이 주인공이라 백날 말해도, 광고가 좋은 반응을 얻으면 자연스럽게 모든 성과는 사실상 CD에게 돌아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팀원들이 빛나면 그 빛은 자연스럽게 팀장을 비추게 되어 있다.
4. 나와 다른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기
30대 중반 처음 3명의 파트원들을 이끄는 파트장이 된 것이 첫 리더의 경험이었다. 그 시절 나는 나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을 선호했다. 나와 생각이 비슷하고 쿵짝이 맞아야 일이 잘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생각은 180도 달라졌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갖은 사람은 나 하나면 족하다. 나에게 필요한 사람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나의 능력과 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내가 못하는 것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나에게 가치 있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CD라면 나와 같은 성향의 사람을 곁에 두기보다, 나와 다른 성향의 사람을 나의 성향에 맞추려 하기보다 그들이 오히려 나와 다른 생각을 이야기하고 다른 능력으로 나를 보완해 주도록 이끌어야 한다.
후배 동료들이 리더가 될 때 표본이 되어주는 선배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할지 아직 모르겠다. 어쩌면 위의 이야기는 여전히 나의 모자람을 때리는 채찍이 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