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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영 Aug 10. 2024

서로의 일

광고 촬영장에서 이틀 째 촬영 중이다.

무덥고 습한 땡볕에서 하루 종일, 다시 어두운 스튜디오에서 하루 더.

촬영 세트와 카메라를 세팅하는 사이 짬을 내어 글을 쓴다.

어림 잡아도 촬영장에는 30명 가까운 사람들이 있다.

광고주부터 광고대행사와 PD, 감독, 촬영감독과 연출스텝, 녹음, 조명스텝과 모델, 의상 담당과 헤어, 메이크업 담당들까지. 하나의 광고를 만드는 데 수많은 전문가들이 각자의 몫을 해내고 있다.

이런 일들이 돌아가는 핵심은 전문가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맡은 일들을 전문적으로 수행하기 때문이다.


광고주 시절, 나는 촬영장에서 감독의 연출에 끝없이 의견을 내는 피곤한 광고주였다.

광고주라는 무소불위의 힘으로 전문 영역을 침범했다.

당시에는 그것이 광고를 잘 만드는데 필요한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 부끄러운 경험의 반작용으로 나는 CD의 롤을 하면서 가능한 감독의 연출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물론 PPM의 약속들이 광고 속에 잘 녹여지고 있는지, 광고의 아이디어와 담아내고자 했던 메시지가 연기나 대사들에 잘 반영되고 있는지를 쉴 틈 없이 체크한다. 하지만 감독이 의견을 물어보는 경우를 빼면 나의 전문 영역이 아니라고 판단되는 것에 개인 선호를 강요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촬영장의 주인공은 CD와 광고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촬영장을 진두지휘하는 사람은 감독이어야 한다.

촬영 전에 프리 프러덕션 미팅(PPM)을 하는 이유는 촬영장에서 감독에게 권한을 위임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CD나 광고주는 PPM을 꼼곰하게 진행하며 필요하고 원하는 것을 모두 요구하고 지시해야 한다. 촬영장에서 PPM의 약속이 잘 이행된다면 가능한 감독이 자신만의 생각을 갖고 연출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사사 건건 PPM에서 약속되지 않은 즉흥적인 이야기들이 난무하거나 PPM에서 약속된 것들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수정 요청들이 오면 감독은 그러한 요구 뒤에 숨어 책임 있게 연출을 하지 않게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광고는 많은 전문가에 의해 만들어진다. 전문가를 전문가로 쓸 것인지, 그저 시키는 일만을 하는 꼭두각시처럼 쓸 것인지는 광고주나 CD에 의해 결정된다.

돈을 준만큼 전문가를 전문가답게, 제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은 각각의 전문가를 믿고 그들의 의견을 최우선으로 듣는 것이다.

광고는 정답이 없는 작업이다. 모델의 의상을 고를 때, BGM을 고르고, 소품을 선택하는 다양한 결정의 순간, 광고주나 CD와 같이 힘을 갖고 있는 이들의 개인 선호에 의해 모든 것들이 결정될 수 있다. 하지만 의사 결정자가 할 일은 그런 선택에 자신의 호불호를 기준 삼는 것이 아니라 의도와 배경을 설명해 주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일이다.


촬영장뿐 아니라 광고를 만드는 모든 과정이 마찬가지다. 각각의 전문 영역에 대한 최대치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것은 그들이 책임감을 갖고 능력껏 일하게 하는 일이다. 책임감을 부여하는 것은 나의 생각을 강요하여 그 생각을 실행하는 허수아비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생각으로 일하게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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