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대행사에 근무하면서 오랜 시간 몸 담아 온 회사의 마케팅을 대행하는 일은 낯설면서도 설레는 일이었다. 회사를 나오고 7년 가까이 될 무렵, 엘지유플러스의 5G 마케팅을 수주하고 진행했다.
근무하던 당시에는 4G LTE 마케팅을 담당했던 내가 10년의 시간이 지나 5G마케팅에 관여하게 된 셈이었다.
통신 업계의 5G 마케팅 방향은 4G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연히 5G의 빠른 속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당연히 새로운 통신 환경은 빠른 속도를 목표로 진화되었고 그것을 소비자에게 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통신사를 나오고 한 명의 소비자가 되자, 속도는 나와는 크게 상관이 없는 가치임을 깨달았다.
기존의 4G 속도에도 큰 불만이 없으니 아무리 빠른 속도를 이야기해도 큰 가치로 다가오지 않았다.
새로운 5G 마케팅에서는 속도라는 표면적 가치가 아닌 소비자가 체감하고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찾고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어렴풋하게 생각한 5G 마케팅의 방향은 1차원 적인 빠른 속도의 소구가 아니라 빠른 속도로 인해 어떤 새로운 변화가 가능하냐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빠른 속도로 가능한 것 중에는 AR이나 VR을 통한 실시간 경험 콘텐츠가 있었다. 대용량의 콘텐츠를 실시간 스트리밍 하기 위해서는 5G의 빠른 속도가 필수였다.
이러한 방향에서 VR이나 AR을 통해 가상 공간을 보여주는 컨텐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에도 가상 공간 컨텐츠는 많이 있었다. 대부분 게임, 엔터테인먼트 적인 것들이었다.
다른 접근이 필요했다. 실제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가상 공간을 만들어 줄 때 5G의 의미와 가치가 빛날 수 있을까?라는 것에 초점을 두고 싶었다.
5G 마케팅에 대한 고민이 많을 무렵, 식사 자리에서 아내는 죽은 고래 뱃속에서 엄청난 양의 플라스틱 나왔다는 기사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가 작은 실마리를 주었다.
기술은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지만 늘 올바른 방향만을 향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기술과 자연은 공존하기 보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지난 시절 기술은 자연을 파괴하는데 앞장선 것도 사실이다. 첨단 기술이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없을까? 가족과의 밥상머리 이야기를 시작으로 하나의 단초를 만들어냈다.
[멸종동물원]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세상에 없는 멸종 동물들이 모여 있는 가상의 동물원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이런 생각을 기획 방향으로 잡고 동료들과 회의를 진행했다.
WWF의 ‘지구생명보고서 2018’에 따르면 1970년에서 2014년까지 척추동물 개체수가 60%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인간의 개발에 의한 서식지 감소, 수렵 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회의를 하면서 어린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 대부분이 멸종되거나 멸종위기 종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피카츄의 모델 아메리칸 피카, 주토피아의 갈색목 세발가락 나무늘보, 리오의 주인공 스픽스 마코 앵무새, 손오공 모델 황금들창코 원숭이 모두 인간의 욕심 때문에 살 곳을 잃고 개체수가 줄어가고 있었다.
이 동물들이 인간에게 말을 할 기회가 있다면 어떤 말을 하고 싶을까?” 아마 인간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들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우린 이 동물들의 이야기를 인간에게 들려줄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렇게 아메리칸 피카, 북극여우, 나무늘보, 황금들창코원숭이, 스픽스 마코 앵무새는 3D 기술을 통해 VR과 AR 속 멸종동물 공원 안에 새롭게 태어났다.
2018년 11월 22일의 보고 문서에 처음 등장한 [멸종동물공원] 아이디어는 처음의 생각과 다르게 꼬박 1년의 기획과 제작기간이 걸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이 캠페인은 여러 회사, 단체들과의 협업에 의해 이뤄질 수 있었다. 가장 공을 많이 드릴 수 밖에 없었던 부분은 당연히 CG였다. 존재하지 않는 동물들을 가상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영화 ‘신과 함께’ 등을 제작한 CG 전문 스튜디오 덱스터와 협업했다. 멸종동물들에 대한 자문과 광고에 쓰일 자료들은 WWF(세계자연기금)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VR을 직접 체험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친환경 출판사 '나무야 미안해'와 협업해 VR 콘텐츠를 입체 그림으로 재현한 팝업북을 출간하기도 했다.
인천의 복합 쇼핑몰에 멸종동물공원 팝업스토어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VR·AR을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5G의 새로운 가치를 보여주자는 의도로 출발했지만 브랜드의 진정성을 위해, 보여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방법도 고민했다. 실제 아이들의 환경 인식 변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환경 실천 프로그램을 모바일로 제공했다.
캠페인이 소개되자 [멸종동물공원]은 많은 단체와 학교에서 환경교육 콘텐츠로서의 가치에 관심을 보였다.
서울시 환경정책과의 협조를 얻어서 환경 담당 선생님과 서울의 여러 초등학교를 방문, VR기기를 통해 멸종 위기 동물에 대한 교육을 진행했다. 결국 우리가 만든 VR 콘텐츠는 한국 초등학교의 환경 교육 교재가 되는 영광을 맛보기도 했다. 광고 하나가 초등학생들의 교재로 활용된 것은 유일무이한 일이었다.
광고제 수상은 덤. 2019년과 2020년 대한민국광고대상을 비롯해 뉴욕페스티벌등 한 캠페인으로 20개가 넘는 상을 받았다.
작은 단초에서 시작했지만 10억이 넘는 제작 예산과 1년이란 시간의 공을 들여 멸종동물 공원이라는 빅 캠페이을 실행할 수 있었다.
만약 LTE 마케팅을 담당했던 경험, 한 명의 소비자가 되어 통신사의 마케팅을 바라본 경험들이 없었다면 아마 우리 역시 빠른 속도라는 5G의 표면적 가치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만 집중했을 것이다.
우리는 5G에 숨어 있는 새로운 가치를 찾고 싶었다. 소비자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가치가 5G 안에 숨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떻게 5G의 빠른 속도를 보여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아니라 "5G의 속도엔 어떤 의미 있는 새로운 가치가 있을까?"라는 질문, 문제의 재정의가 새로운 가치를 찾아낼 수 있는 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