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 가지 금기어의 조합이 만든 '미친년 팔짝 뛰겠네 증후군'이 10년 차 주부에게 찾아왔다. 남편 선택적 눈시림증, 분노조절 장애, 분노 시 조음 장애와 말 더듬, 탄수화물 애착현상 등등.
아! 돌밥, 돌밥, 코로나, 호랑말코 로나자식, 끼니때마다 나만 바라보는 8개의 눈동자여!
어차피 내게 짐 지워진 프로메테우스의 운명이라면 내일도 반복될 저주인데 감정의 늪에 빠지지 않겠노라 선언한 ESTJ의 계획은 식단표였다.
이래 봬도 주부대학 살림과의 10학년 되시겠다, 고인 물에게 한 달에 리포트 한 장 쓰는 것쯤이야 무슨 대수인가. 한 달 살기 식단 리포트 쓰기가 아직 어렵고 엄두가 안 난다는 새내기를 위하여 족보를 전수한다.
첫째, 냉장고에 남은 식재료를 파악한다.
제일 중요한 첫걸음이다. 야채실 깊숙한 코너에서 화석을 찾아내고 냉동실에서 유통기한 5년 전의 유물을 찾게 되더라도 놀라지 말자.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며 냉동고/냉장실 별로 사용할 수 있는 재료만 남겨 목록을 기록한다. 앞으로 어떤 식단을 꾸려갈지 방향키를 쥐고 있는 시발점이다.
둘째, 가족구성원 설문조사를 시행한다.
어쨌든 민주주의 국가니까, 먹고 싶을 권리를 주자. "잔소리 말고 주는 대로 그냥 먹어!"라는 말이 콧김에 같이 쉭쉭 뿜어지지만 약간의 평화를 위해 참아보는 거다. 요리책이나 핸드폰에 음식 이미지 사진을 띄워 각자 먹고 싶은 메뉴를 골라보라고 펼쳐둔다. 그러면 가족들은 마치 뷔페에서 맛난 것들로만 내 접시를 채우는 기분을 잠시 누릴 수 있다. 엄마는 메뉴 고민도 덜고 식구들은 본인의 초이스로 이루어진 식단일을 기대하며 기다린다. 이 얼마나 훌륭한가. 엄마는 백성 한 명 한 명에게 귀 기울이며 애민정책 펼치시는 군주로 칭송받을 수 있다.
정말 부지런히 해 먹였구나
셋째, 재고처리가 시급한 냉파에 돌입한다.
이제껏 돌보지 아니한 냉장고는 보물창고다. 예상외의 식재료를 발견하는 기쁨이라는 보물과 장바구니를 가볍게 해주는 생활비 절약이라는 보물. 주방의 금과 다이아들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 적어보자. 남은 식재료와 냉파 목록이 작성되면 이제 메뉴를 짜 볼 차례다.
넷째, 아침은 밥-간식-밥-간식처럼.
굳이 밥을 마다하는 사람이라면 고민할 여지가 없겠지만 남편은 밥돌이다. 시대의 밥돌이도 시국의 흐름을 받아들여 가정의 평화에 이바지하기로 합의를 보아 밥, 간식, 밥, 간식을 격일로 넣었다. 남편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 덕분이기도 한 것은, 아이들이 간편 간식에 입맛을 들이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아침에 할 수 있는 몇 가지를 정해놓고 겹치지 않게 퐁당퐁당 잘 넣으면 "또야?"라는 소리를 듣지 않고 하루를 웃으며 시작할 수 있었다.
주요 족보 내용에 몇 가지 팁을 덧붙이자면, 결코 이 식단대로 완벽히 이행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식단표대로 꾸준히 요리할 수 있도록 해 주는 힘은 '지치지 않는 것'. 배달이라는 치트키를 적절히 계획하에 넣도록 한다. 식단표의 레시피 등급정도를 눈으로 가늠하다가 '아, 이 날은 무리야' 싶은 메뉴의 사이에 쉼표를 찍고 가면 그날을 기다리는 재미도 있고 예상외의 즉흥적인 외식비를 줄일 수도 있다.
다음 팁은 간편히 차리더라도 영양 밸런스는 맞추라는 것. 5대 영양소를 한 끼에 담아내진 못하더라도 그날의 식단 안에 버무려 내도록 노력했다. 아침으로 모닝빵에 설탕 범벅인 잼을 듬뿍 발라 먹더라도 점심이나 저녁 한 번은 건강식으로 내놓으면 식구들의 장은 안녕하리라 위안삼을 수 있었다. 이런 식의 죄책감 덜기용 끼워 맞춤이 결국에는 식단표 구성하는 작업에 힌트가 되기도 하였다.
식단표를 작성하고 냉장고에 붙여놓았다. 남편은 물 마시는 척 관심 없는 척하며 그렇지 못한 강한 집중력의 눈빛으로 종이를 훑는다. 아이들은 옹기종기 모여서 이 날은 무얼 먹는 날, 저 날은 배달시켜 먹는 날, 아 빨리 며칠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며 들떴다. 끼니때마다 냉장고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미간을 모은 채 스캔을 뜨던 시간이 완전히 사라졌다. 오늘 저녁엔 뭐 먹을 거야?라고 묻고 은근히 본인 취향의 메뉴를 강요하던 4인의 집요에서 벗어났다. 이 중 괄목할만한 전환은, "라면 없어?"라는 허튼소리 빈도의 감소랄까.
3년 전 리포트를 아직도 사진첩에 간직한 채 뿌듯해하며 살았는데 글을 쓰고 나니 제출한 담당교수가 식구들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아 왠지 기분이 찜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