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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니애 Mar 20. 2024

학부모 총회에 운동화 신고 가는 엄마

 총회의 아침이 밝았다. 6:30AM. 지금부터 다섯 시간 동안 부지런히 꼬까 단장을 하고 오랜만에 사회생활용 가면을 꺼내 쓸 때가 왔다. 정오즈음부터는 아침에 삼 남매를 깨우며 샤우팅을 날리던 얼굴 근육에 최면 필러를 넣고 하하 호호 웃고 있을 참이다.

 "어머, 길동이 어머니 잘 지내셨어요?"

 "안녕하세요, 동동이 엄마입니다."


 총회 참석 6년 차, 그동안 변함없는 드레스 코드는 옷장에서 제일 단정한 세미정장과 반짝반짝 닦아놓은 구두, 그리고 화룡점정의 검은 백. 올해도 디데이가 가까워질수록 무얼 입고 갈지 고민하며 애꿎은 옷장만 열었다 노려보고 화를 내는 중이다. 옷장, 네 놈 안에는 매년마다 왜 입을만한 게 없을 일인지. 살은 또 왜 이렇게 찐 건지. 방금 전까지 정신 놓고 까먹던 초콜릿과자 봉지가 식탁 위에서 날 비웃는 줄도 모르고.

  큰 아이가 1학년일 때 막둥이는 세 살이었는데, 메고 다니는 가방이란 게 죄다 기저귀 가방이었던 어미는 총회 날 변변찮게 어깨 한쪽을 장식할 핸드백이 없었더랬다. 갓 어린이집에 입소시킨 다둥이 엄마, 잠시라도 누굴 만날 일이 있으면 들고 다닐 가방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게 온라인 쇼핑 투어를 하다가 핫템을 발견한다. '어머, 이거 가격 너무 괜찮은 거 아니야?' 하며 주문한 사각의 준명품백이 도착하고 보니 B급 중국산 짝퉁이었더라는 조금은 슬프고 모지란 이야기. 슬픈 모지리에겐 기저귀 가방만 하나 더 늘었을 뿐이었다.

 B급이면 어때, 누가 내 가방만 보고 있을 것도 아닌데. 당당히 짝퉁을 메고 참석한 총회에는 다들 선을 보러 나오신 건지 돌잔치에 참석하러 오신 건지. 유모차를 밀며 동네를 다니다가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던 수더분한 그녀들이 아니었다. 세련미 넘치는 화장, 올 빠진 데일리 원피스 대신 슬랙스에 재킷, 장바구니 말고 금색 체인이 줄줄 달린 명품백들. 참관수업과 총회를 함께 하는 자리에서 아이들은 저마다 '우리 엄마'를 찾으며 눈을 빛내고 뒤를 흘끗거릴 때, 아이를 향해 반갑게 화답해 주는 건 엄마들의 눈인사만이 아니었다. L&V, YSL, G와 반전 G, C와 반전 C. 가방에 달린 금빛 체인과 중앙의 로고들이 '번쩍'하고 교실 형광등에 반사되며 아이들을 향해 눈부시게 마주 인사했다.

 내가 만난 아지매들의 아름다웠던 전성기가 눈앞에 그려졌다. 편한 슬립온이나 슬리퍼 대신 하이힐을 신고 테헤란로를 도도하게 걷고 있었을 법한 여인들이. 그리고 그 사이에 깨끗함 외엔 별 내세울 게 없는 평상복을 입고 짝퉁 가방을 멘 모지리는 점점 무대 위에서 홀로 흑백으로 암전 되는 기분을 느꼈다.

 주인공 맡으려고 참석한 총회가 아님을 안다. 명품백이 사람을 대변해 주는 것이 아님도 안다. 거기 모인 학부모들이 평소에도 명품을 휘감고 다니는 사치를 부리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럼에도 그곳에서 느꼈던 위축감은 누구 엄마는 샤땡을 메고 있네 입땡을 메고 있네가 아니라 '지금의 나는 기저귀 가방만으로 국한되는 정체성이구나'라는 자조에서 비롯되어 나를 작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었다.

 다행이랄까. 다음 해, COVID가 터졌고 몇 년 간 대면 총회와 참관수업이 멈췄다. 그 사이, 나에겐 중박쯤은 칠 수 있는 백이 겨우 하나 생겼고 엔데믹이 되고는 엄지손가락 빨고 자던 막둥이도 어엿한 초등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올해. 드디어 나는 삼 남매 모두 한 학교에 보내는 학령기 학부모다. 그냥 학부모라 부르면 섭섭하지. 나? 입학 예비소집일 때 시간 맞춰 세수만 잘하고 서류 내러 간 경력직 학부모다 이거야. 겨우 예비소집일일 뿐인데 코트를 쫙 빼 입고 목에는 모피를 두르고 온몸에 힘이 들어간 가족들이 보인다. 살짝 상기된 아빠 엄마의 양손을 붙잡고 오는, 누가 봐도 '나는 첫 자녀예요'의 예비초등생들의 입장을 보니 올해의 총회도 수수하지만은 않을 것임을 짐작한다.


 총회 관련 모바일 알림이 일주일 내에 수십 개가 쌓였다. 1학년은 어디이고 3학년은 어디이고 몇 시부터 무얼 하고 눈이 핑핑 돌아가지만. 훗. 삼 남매 키우려면 이런 것쯤 대수롭지 않은 척 콧방귀를 뀌어주며 의연함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오오, 역시 다둥이 엄마는 달라'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거든.

 잠시 있을 총회에 참관수업과 반별 회의까지, 아이의 반을 뛰어다녀야 하는 강행군 스케줄이 예약 중이다. 그럼에도 허둥대는 모습을 들켜 애가 셋이라 정신없다는 구멍을 보이기 싫다. 우왕좌왕하지 않으려고 TJ엄마답게 정확히 시간과 장소를 기록해 둔다. 세 아이 각자의 성향과 동선을 고려하되 공평한 시간 배분에 따른 신속한 이동이 오늘의 미션이다. 복도를 런웨이 삼아 구두 굽이나 또각거릴 새가 어디 있나. 다음 학년 출동 대기에 편한 복장을 갖추고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여볼 참이다. 사슬 달린 검정 백은 옷장에 도로 넣는다.

 더 필요한 준비물이 있다면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다른 아이와 비교하지 않는 마음, 따뜻한 시선, 선생님을 존경하는 예의. 그거면 충분하다.


<모든 사진 출처:언스플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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