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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니애 Feb 28. 2024

결혼유지 계약갱신이 완료되었습니다

 슬슬 지겹고 미워지던 참이었다.

 분리수거 통에 가다 말고 불시착한 음료캔. 비닐 분리수거 귀찮으니 나 먹으라는 배려를 가장하여 한 줌 남겨놓은 과자 봉지. 빨래 가지런히 개어 서랍에 넣으라 에 안겨주면 넣을 곳이 없다며 드레스룸 아무 데나 박아두는 옷가지들. 샤워 후 단 한 번도 물긁개로 닦지 않아 사우나실이 되어버린 샤워부스. 손에 닿는 곳에 물건이 있어야 한다며 잡동사니 널려 있는 그의 책상. 서서 일을 해결하는 자의 흔적이 남은 변기.

 결혼 13년 차, 그의 꼬리는 탈피를 거듭하여 성체가 된 구렁이처럼 영역표시를 진하고 넓게 남겼다. 이 집의 공동명의를 잊지 말라며 행위로나마 주장하는 듯 보였다.


 아이들이 어릴 적엔 제법 움직였던 그였다. 셋째를 낳고 육아와 살림에 넋이 나가 차가운 베란다 바닥에 앉아서 눈물을 뚝뚝 흘리던 시절만큼은 그랬다. 쓰레기를 버린다든지 설거지를 한다든지 무엇이라도 그의 몫이 있었다. 비록 아기띠를 단 한 번도 매어보지 않은 간 큰 아버지였지만 다른 방법으로 도와주기도 하니 허리가 끊어져 나가는 고통에도 10킬로 넘는 아기는 내가 안으마 했다. 한창 일할 나이라 당신의 삶도 고단하겠지, 회사에 다녀오는 그의 식탁의 구색 맞추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가장의 무게도 힘겨울 테니 잔소리도 꾹 참았고 아이들 앞에 고성이 왕래하는 부모가 되기 싫었기에, 그와 나 사이의 잦은 파도가 일렁일 때는 기꺼이 방파제가 되어 해일을 멈추었다. 이렇게 매번 한 발짝 한 발짝 양보하는 사이, 삼 남매의 아버지라는 자는 튀어나오는 배만큼 간의 면적도 넓어졌나 보다. 빨래는 세탁기가 하고 설거지는 식세기가 하고 청소기는 로봇 청소기가 하는데 무엇이 힘드냐 하는 겁 없는 용사가 대체 누구인가. 그가 바로 내 남편이다.
  이 남자를 누가 골랐나. 부모님이 정해 놓은 정략결혼도 아니고 혼기 차서 억지 춘향이로 선 본 남자도 아니다. 그렇다. 내 손으로 고른 쇠도끼다. 내 주제에 금도끼 은도끼는 언감생심이니 바깥일 성실히 하는 돌쇠도끼로 골랐지. 발등을 찧더라도 일하는 도끼에 찍히겠노라 근면성실과 책임감 하나는 기똥찬 돌쇠도끼와 함께 우거진 숲을 헤쳐나가 보자며 종신형 계약에 순진의 도장을 찍었던 것이다.

 그동안 낙장불입 종신형 계약에 몇 번이고 찾아온 고비를 잘 모면해 왔으나 산을 넘고 평지가 지속되면 권태손님이 으레 문을 두드리는 법인가 보다. '장기투자의 애로사항을 좀 들어주세요.' 주일예배에 나가 하나님을 불러보았더니 목사님을 통하여 돌아온 말씀은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 신다. 있는 그대로를 용납하라는 일침에 되려 뒤통수얼얼하다. 슬쩍 곁눈질로 그의 표정을 훔쳐본다. 은혜 충만한 얼굴이구나. 역시나, 이 남자와 살아온 13년의 대부분에 주님은 그의 손을 더 들어주는 편이었다.

 이번에도 내가 져야 하는가!  


 예배가 끝난 주말 오후, 화개장터 방불케 하는 삼 남매의 거실에서 도피하여 그만의 동굴에 칩거하는 남편의 방을 지나가며 온갖 궁시렁과 눈총병기를 쏘아대던 중이었다. 부지런히 입을 움직여 그에게 들리지 않을 악다구니를 속사포 랩으로 쏟아내는 라임과 함께, '삐리리릭 삐리리릭, 공동현관에서 호출이 왔습니다.'. 벨이 울렸다. 누구지? 초대한 적 없고 주문하지 않은 낯선 방문자는?

 피곤하기도 하고 수상한 기운이 들어 없는 척했더니 남편의 전화에 다시 벨이 울린다. 전화를 받아 들자 갑자기 공손해지고 황급해진 그가 현관으로 튀어나갔고 무언가를 건네받는 소리가 난다. 저 남자가 무슨 꿍꿍이인 걸까.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모두의 이목이 남편에게 집중되었다. 기분 탓인가, 키가 좀 큰 것 같고 어깨의 평수가 좀 넓어진 듯한 남편. 한 손엔 케이크 상자와 다른 한 손엔 와인 병이 들려 있다. 갑자기? 케이크와 와인? 왜지? 아무리 짱구를 굴려봐도 납득되지 않는 상황이다.

 "갑자기 이게 왜 우리 집으로 와?"

 놀라기는 했지만 연신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출 수가 없어서 생일맞이한 중2병 사춘기 애들 빙의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됐어, 아직은 쿨해 보여. 차마 케이크 상자의 리본도 풀지 못한 채 꾸러미 근처를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요리조리 왔다 갔다 하는 내 모습은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다는 걸 모른 채. 쿨한 척 건넨 질문의 답은 무심히 돌아왔다.

 결혼기념일.

 어? 뭐라고? 얼어붙었다. 혹은 돌처럼 굳었다. 그러니까, 오늘이 며칠이었더라?

 아주 잠시만 잊었던 것처럼 둘러댔다. 변명하자면, 겨울이란 계절은 그날이 그날 같은 흐림의 반복이며 애들 방학을 두 달째 버티면서 머리에 꽃을 하나 둘 달아가는 중이라고. 초점 둘 데 없이 초조히 굴러다니는 와이프의 동공을 바라보는 남편의 눈빛에서 그의 심중을 읽을 수 있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더니.'

 솔직히 고백한다. 잠시 잊었던 것이 아니라 완전히 망각되었던 것이 맞다. 2월에 들어선 지 한참이었지만 이 달에 결혼기념일이 있었다는 것, 아니 우리에게 기념할 만한 날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조금 더 진실해보자면, 결혼기념일에 기대하는 낭만이 남아 있지 않았던 탓이 아닐까 싶다.

 13년을 꽉 채우며 세 번의 출산과 두 번의 유산을 겪은 부부에게는 눈빛만 마주쳐도 스파크가 튈 성적 매력들도 퇴화 진행중이다. 당신을 바라만 보아도 즐겁소 하던 뇌가 더 이상은 도파민을 분비하지 않는다. 어쩌다 알콩달콩 시절을 추억하며 '나 사랑해?'를 던지면 돌아오는 건 '이 여자가 미쳤나?'의 눈빛이다. 그 눈빛을 기억했던 와이프는 어느 날 부엌에서 뜬금없이 백허그를 시도하는 남편의 귓가에 나직이 읊조린다. "나 칼 들었어."

 바야흐로 큰 아이는 사춘기 완행열차에 올라탔고 삼 남매 모두가 학원 하나씩은 기본으로 끼고 있는 마당에 설레는 사랑이 우리의 사이를 메우는 일상 중 어딘가에 남아 있을까. 고로 13년 차 부부의 낭만이란 이런 것이다. 이번 달 관리비가 3만 원이나 줄었어, 아이 레벨 테스트가 생각보다 잘 나왔대, 둘째가 드디어 구구단을 술술 외워. 셋째는 가르치지 않았는데 한글을 깨쳤어!

 낭만을 통장과 자식들에게서 찾으니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이 숲을 함께 헤쳐가는 전우여야 하기에, 나무를 잘 베어 낼 쇠도끼여야 하기에. 조금 더 단련이 되어주었으면,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었으면 하는 욕심이 불만으로 자리 잡아 내 안에 가득 차 있었다. 불만의 먹구름이 빽빽하니 낭만이 보일 턱이 있나. 식탁 위를 바삐 세팅하는 여인의 차림새도 투명한 와인잔의 관능적인 곡선과 어울리지 않게 내의 차림이다. 남편에게도 낭만은 죽었다.

 어쨌거나 우리 또 잘 살아보세, 와인잔을 짠 부딪치고 투명한 자줏빛 액체 너머 보이는 수염 거뭇한 아저씨의 덤덤한 얼굴을 보니 조금 전 구시렁대었던 소리 없는 아우성이 미안해진다. 어쨌거나 기념일을 기억하고 챙긴 사람은 그였지 않나. 와이프가 기념일을 잊었어도 '마, 내가 그래도 오빤데'라는 뉘앙스를 팍팍 풍기며 강호의 대사형처럼 넘어가주는 배포, 그런 남편이 다소 귀엽지만 '맞아, 그래도 당신이 멋지지' 라며 엄지를 날려주는 의리. 그것들이 낭만은 사라져도 부부가 결혼 종신 계약을 이어갈 수 있는 보험이 되어주는 것이다.

 케이크의 달콤함이 엔도르핀을 흩뿌린다. 남편의 부른 배가 넉넉히 채워진 인품으로 보인다. 향긋한 와인 한 모금을 곁들이니 10년 전보다 듬성한 머리숱 사이 공간으로 지혜의 빛이 어른거리는 듯도 하다. 미워도 다시 한 번 사랑을 시작해볼까. 당신이 아저씨가 되어버린 세월에 나도 그만큼 늙고 주름지고 쳐져 가는 중임을 잊지 말고 서로 가엾이 여기며 14년 차의 숲을 헤쳐나가보자.

 이리하여 올해도 결혼 계약은 무사히 갱신 완료되며 넘어가게 되는구나.

 


 그런데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남편의 머리에서 커스터마이징 케이크와 와인 특별 주문이란 있을 수가 없다. 파리 빵집 케이크의 가격에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사람인데 그에게서 나올 수 없는 레벨의 서프라이즈다. 남편에게 설렌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그가 낯설다. 집요한 심문에 자백을 받아냈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이벤트 서비스였다고. 그러면 그렇지. 고구마 케이크 같은 걸 사 왔으면 갱신 못했지.

 여보, 결국 이 결혼 계약은 변액 보험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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