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6일, 그날의 포털을 빼곡히 채운 뉴스들을 훑는 도중에 한 기사의 제목에서 시선과 스크롤이 멈추었다.
가방끈 길면 오래 살더라.
학력이 높을수록 장수한다는 연구는 꾸준히 있어왔지만 지속적으로 데이터를 쌓아가다 보니 인과는 명료해지고 근거는 세분화되고 정밀한 수치화를 도출해 낸다는 내용이다. 저학력자를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건강관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낮아서 식습관, 술, 담배 등의 유해환경에 노출되기 쉬우며 공교육이 1년씩 늘면 조기사망위험이 1.9% 감소한다고 한다.
어쩌면 뻔한 기사 내용에 시간을 내어준 이유. 흥미가 돋아서는 아니었다. 결국 부정할 수 없을 거라는 결말에 저항하며 '뭘 그리 대단한 연구를 하면 이런 결론인데'라는 슬픈 심정이었다.
아버지의 집안은 배움이 짧았다. 그저 시골의 적당한 땅에서 먹고 살만큼으로 자족하셨던 분들이고 생활력만 강한 고모 몇 분을 제외하고선 더 나은 삶과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 그 시대의 욜로인생이었다. 자녀를 건사해야 한다는 큰어머니와 작은어머니가 가진 모성의 힘이 아니었으면 가정이 온전했을까 싶다. 가정경제야 어쨌든 타인에겐 한없이 베푸니 사람 좋다는 평을 듣는 건 당연지사. 술 담배는 기본이요, 건전한 생활습관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큰아버지는 자식이 장성한 것만 보고, 작은아버지는 자식이 장성하기도 전에 일찍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집안은 교양과 배움이 중요했다. 외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칠 남매의 인생이 바람 앞의 촛불 같기는 했었다. 그래도 삼촌들은 남자라는 명분이 있어 야간을 나가서라도 대학을 졸업했고, 이모들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 시절 지역 최고의 여상을 나왔기에 적절히 좋은 혼처를 잡을 수 있었다. 최대의 피해자는 아들도 아니고 마지막 딸이라서 육성회비 몇천 원에 설움 당하고 남자들 뒷바라지로 희생된 나의 어머니.
가세가 기울고 학력의 낮음 탓에 좋은 혼처를 찾기 어려웠던 엄마는 사실 속아서 결혼한 게 맞다. 결혼식 앞두고 겨우 두 달 넣어놓은 적금을 가지고 적금통장이 있다며, 분리도 안 된 쪽방을 빚으로 내면서 신혼집이 마련되어 있다고, 큰아버지가 다 저당 잡혀버린 논을 가지고 시골에 땅이 있다며 과대포장한 공갈빵 혼처였다. 신앙 하나 보고 그럭저럭 성사된 혼인이었을 뿐이었다. 등으로 마주한 인생관이 이끄는 결혼생활은 도무지 물리지 않는 톱니바퀴로 평생을 삐그덕 대며 굴러가는 수레였다. 그리고 그 수레의 마부는 줄곧 어머니. 두 딸의 대학등록금과 기숙사비 납부 기한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 물처럼 숨통을 쥐고 흔들 때에도, 20년을 넘게 살던 집이 재개발로 건설사에 넘어가 제 값도 못 받고 이사를 나가주어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도 아버지는 준비 없는 낙관론자였다. 어머니의 수레는 늘 무거웠다.
어머니의 수레엔 여러 봇짐이 실려 있었다. 재정, 남편의 건강, 남편의 사회생활, 자식의 교육과 미래. 도무지 공교육이라고는 반공교육밖에 안 받은듯한 남편에겐 지적으로 존경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건강에 대한 시각도 무척이나 협소해서 아직도 마이웨이 식생활인지라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내 아버지의 수명은 1.9%가 아니라 9.1% 낮아졌을 거다.
이런 삶 가운데 어머니의 희망은 자연스럽게 두 딸이 되었다. 너희들만은 잘 커주렴, 학식이 모자란 이 집안에서 우리 집만큼은 저들과 같아서는 안 돼. 산복도로에 조금 못 미치는 어중간한 달동네, 스레트 지붕을 얹고 대문 하나에 단칸방 셋집을 낀 낡은 집. 오줌이 마려우면 밤중에라도 좁은 마당을 지나야 만 했던 재래식 화장실. 그마저도 셋집과 함께 쓰느라, 쭈그려 앉은 변소 구멍 저 밑의 구더기가 구물거리고 있는 똥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던. 이 집에서는 절대 딸들을 시집보내지 않겠노라고 홀로 굳은 맹세를 다진 어머니가 힘겨운 수레몰이를 하실 때마다 버릇처럼 중얼거리던 말은 '소도 디딜 언덕이 있어야 일어난다'였다.
비록 육성회비 못 내서 학교도 제대로 다니기 힘들었지만 아이들만큼은 번듯하게 키우고 싶어서. 교양이 부족한 집안으로 시집왔어도 내 지아비 한 명만큼은 번듯이 내조하고 싶어서. 이 달동네에서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기를 쓰고 다리를 움직여보지만 안쓰러운 내 어머니, 어디 하나 디딜 언덕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좋은 혼처를 찾고 대학을 나온 외삼촌과 이모의 자녀들은 혈통의 당연한 수순을 밟듯 국내외 명문대로 속속 들어갔다. Havard 의대, UC Berkeley, UCLA, 서울대 등등, 인 서울 명문대와 지방국립대 졸업 학사모가 사촌들의 머리를 장식했고 이모와 삼촌들의 면류관이 되어주었다. 어머니는 조카들의 고학력 취득을 보며 어떤 기분이었을까. 사는 게 바빠서 먹이고 입히는 것만으로도 벅찼을 당신은 평생 자식을 미안한 마음으로 키우셨을 것이다.
'내가 조금 더 배웠더라면 너희들을 지금보다 잘 키워냈을 텐데.'
하바드, 서울대 나온 사촌들까지 갈 것도 없이, 내친아(내 친구 아들)를 볼 때마다 어머니의 기분을 느낀다. 요즘은 인성도 공부도 즐거움도 놓치지 않고 똑소리 나게 잘 키우는 엄마들이 어찌나 많은지. 대기업을 중심으로 모여든 신도시 엄마들은 또 어찌나 고학력자에 화려한 경력들을 갖추었는지. 삼 남매들에게는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못할 말이지만 날마다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내적 고해성사를 진행 중이다.
'엄마가 조금 더 배웠더라면 너희들한테 더 나은 가이드를 해 줄 텐데.'
말 못 할 속내를 조금 더 털어놓자면 나보다 긴 가방끈을 자랑하는 남편을 만난 덕분에 자녀 교육만큼은 내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되겠다는 자격지심도 존재한다. 아들은 엄마 머리를 닮는다던데. 에미를 닮았나 보다. 아비를 닮았으면 공부는 잘했을 텐데. 이런 류의 소리를 듣게 되는 건 아닌지 못내 두렵다.
뱉으면 질까, 차마 남편에게 고하지 못한 자격지심과 두려움을 감추려 오늘도 자녀교육 영상이나 육아서를 뒤져본다. 짧은 가방끈을 이어보려는 얕은 수작이지만 어찌 됐든 그렇게라도 늘려서 수명의 끈도 늘려야 하지 않겠나. 영어 숙제를 한답시고 신경질을 부렸다가도 갑자기 거실로 나와 춤을 추고 있는 사춘기의 미친 아름다움을 마주하면 남편 혼자 남겨두고 먼저 떠날 수는 없는 일이다.
12년 동안 수십 권의 육아서를 읽었고 엄마표 한글에 수학에 영어도 가르쳐봤다. 짧은 가방끈을 부지런히 리폼하며자식들을 키우는 중이다. 덕분에 영재는 못 되어도 둔재로 만들지는 않는다. 다행이다, 역시 사람은 배워야 지경이 넓어지는 법이다.
그렇기에 배움이 짧은 탓에 딸 뒷바라지가 부족했다 미안해하시는 어머니에게 한 마디 남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