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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니애 Feb 01. 2024

오빠야, 기독교라 제사 안 지낸다며?

<대문 사진출처 Pixabay>


 그것은 프러포즈였다.

 "우리 집에 숙모들이 좀 계시긴 하는데 너 혼자 힘들게 일 부리실 분들은 아니야."

 눈이 내리던 날, 혼수용 가구단지를 다니느라 새빨갛게 시려진 손을 감싸주던 교회 오빠는 그것이 혼인의 약속인 듯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교회 여동생은 그게 또 순전한 사랑 같아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12월이었다.


 예식은 교회에서 예배식으로 치러졌고 목사님 두 분의 축도와 하객들의 축복에 환희로 시작한 결혼이었다.

"허허, 우리 집안이 좀 너르지."

 폐백을 드리며 절을 하는 동안, 시댁 식구들이 좀 많다는 생각을 했지만 '결혼식인데 이 정도는 다 모이실 수 있지' 라며 괜한 걱정 같은 건 두터워지는 절값 봉투 아래 사뿐히 스러졌다.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첫 시댁 방문 날, 가족이 되어 함께하는 첫 밥상이라며 기도문을 정성스레 준비하신 분이 내 시아버님인 것에 감사했다. 성공적인 결혼생활의 시작임에 틀림없었다.


 드디어 첫 명절. 제사는 없지만 명절음식은 준비하는 줄 알기에 아침 일찍 건너간 시댁 부엌 어디에선가 위험한 조짐이 흘러나와 며느리의 육감을 곤두세웠다.

 많다. 지나치게 많다. 고작 세 끼니를 함께할 음식의 종류가.

 명절 단골 전과 튀김류를 일단 제외하고서 양념갈비, 감자탕, 육개장, 시래깃국, 탕국, 콩나물국이 곰솥마다 가득한데 어머니는 김밥을 말 준비를 또 하고 계신다. 보름 전부터 장을 봐서 음식을 준비하셨다는 어머님 말씀에 눈과 머리가 바쁘게 굴러갔다. 도대체 왜요? 남편이 4형제이긴 하지만 그래도 식구들 다 모여봤자 9명인데. 아 맞다, 작은아버님들 가솔까지 합하면 8명 추가. 그래도 이상하다. 시댁 냉장고와 다용도실에 쌓인 식재료들은 아무리 봐도 성인 16인 분 기준이 아니다.

 "우리는 제사를 안 지내잖아, 그런데 큰집이랑 작은집에서 왔을 때  음식이 초라하면 흉본다."

 이건 또 무슨 말씀인지. 도무지 이해를 못 하고 있어서 해설이 필요한 사람을 찾을 때 교회 오빠는 어느새 슬그머니 내 곁에서 사라졌다. 우리 가족 제사 안 지낸다고, 명절마다 우애 있게 부지런히 모이지만 며느리 기 잡아서 일 시킬 사람 없다며 시린 내 손 감싸 쥐고 말하던 바로 그 남자가.


  이봐요, 그 대신 증조할아버지 밑으로 다 모인단 얘긴 안 했잖아요. 명절 당일에 각각 10km 거리의 세 집(큰 할아버님, 우리 할아버님, 작은 할아버님 댁)을 반나절만에 순회하는데 우리 집 빼고는 제사를 다 지낸다는 정보는 왜 함구했나요. 상 차리고 먹고 치우고, 상 차리고 먹고 치우고를 세 번 반복하여 배가 터질 때쯤, 친정집 방바닥이 그리워지면 시고모님 댁에서 부른다는 말은 없었잖아요. 몇 년 뒤 더 불어난 가족을 세어보았더니 마흔세 명이었던가.





 제사상에서 물러나온 문어와 수육을 썰고 과일과 전을 재배치하며 몇십 인분 밥과 국을 날라 푸짐한 상을 차리면 남자들이 둘러앉는다. 새우튀김이 어디 있소, 양푼이 그릇에 나물만 얹어 밥을 비볐는데 앉을자리도 없어 의자 하나에 며느리 엉덩이 두 개가 붙어 앉아 비빔밥을 사흘 굶은 듯 밀어 넣는다. 다음 차례의 할아버지댁 며느리들은 15분 먼저 일어나 용역에 동원되듯 한 차에 실려 떠난다. 가족영화를 빙자한 스릴러 액션물 과정을 돌려 감기가 세 번. 친정 할아버지 대부터 기독교 집안이라 제사라곤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며느리에게 기이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도시를 바퀴 도는 명절 부엌데기 투어에 어떤 이가 즐거울까. 며느리들은 대체 이 연례행사를 언제까지 할 것이냐 문어를 썰고 생선살을 뜯으며 한숨을 쉬었다. 우리의 연대의식은 O 씨 남편을 두었다는 것이지,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집안 남자들 흉을 볼 때마다 쌓이는 은밀한 유대감. 가끔 그저 헤실헤실 웃고 있는 본인의 남편과 눈빛이 마주치면 따가운 눈총보내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어느덧 손에 들린 믹스커피 잔을 홀짝이면 피로가 또 풀리는 듯하여 여인네들은 이내 웃으며 재담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피차 이름도 서로 모르는 아주머니들과 6촌 7촌들이 옹기종기, 그래도 우리 가족이라 만난 거네 반가이 여겨 서로의 입속으로 유과며 과일을 넣어주었다.


 대가족 행사의 사진을 보거나 이야기를 전해 듣는 이들은 혹은 다복하다 부러워했고 혹은 이 집안은 며느리들이 잘 들어왔네 라며 칭찬을 했다. 전자 후자 모두 호의적인 반응일지라도 속아서 결혼한 며느리에겐 반나절 코스 투어가 그저 유교문화의 답습에 벗어나지 못한 답답한 풍속인 것만 같았다. 신발이 너무 많아 현관문을 닫을 수 없도록 3~40명이 모이고, 설거지 그릇이 200개는 족히 나오는 민족행사를 화목하게 치러낼 수 있음이, 며느리들의 희생이라는 충분조건 덕분이 아니고는 무엇으로 설명이 될 것이냐고. 이 명제에 반박은 필요 없지만 잡음 한 번 없이 웃음으로 다음을 기약해야 하는 난제이기 때문에 몇 가지 필요조건은 반드시 존재했다.

 필요조건 하나, 전을 부치고 기름을 튀길 때 작은 아주버님은 꼭 시작과 끝을 지키셨다.

 둘, 설거지는 반드시 남자들이 돌아가며 한 명씩은 참여했다.

 셋, 시댁보다 친정에 더 오래 머물더라도 남편은 흔쾌히 함께해 주었다.

 넷, 노동현장에서 카페인 결핍 증후군 환자가 발생하면 남자 중 하나는 잽싸게 나가서 아이스커피를 사다 대령했다.

 다섯, 모든 며느리의 수고를 합쳐도 감히 따라잡지 못할 일을 감당하시는 시어머니가 자식들을 늘 편안하게 해 주셨고, 평소 며느리에 대한 간섭이 일절 없었다.

 위의 조건들이 균형을 완벽하게 이루었기에 O 씨 집안 며느리들은 커피 한 잔에 또 잊힐 노동 현장으로 기꺼이 웃으며 합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부모님의 귀농과 함께 몇 년 전부터는 3형제 할아버님들 간에도 거리 두기가 시작되었다. 그동안 할 만큼 했다며 시대의 흐름도 따르자며 각자의 집으로 흩어져 명절을 보내게 된 것이다. 도시 관광 없이 한 집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먹을 만큼의 음식을 만들고 예배를 드리며 가족의 사랑을 돈독하게 결속시키는 명절. 교회 오빠의 약속이 8년 만에 이루어지는 감동의 순간이었다. 보름 전부터 시작되는 어머님의 시장보기는 일주일로 단축되었고 음식 양도 가짓수도 현저히 줄었다. 그래봤자 4남매 중 장남이신 아버님 댁으로 온 식구가 다 모이면 스무 명이 훌쩍 넘지만.


혁명적으로 간소해졌다


 제사도 없는 집안에 꼴랑 명절 두 번 몰아 일하면서 투덜거리는 몹쓸 며느리의 O 씨 집안 고발은 여기까지. 혹시 누가 위 사진을 보고 알아채서 일러줄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하니 아름답게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일당 없는 200그릇 설거지와 시댁 투어 강행군이 진행되는 동안 왜 도망을 못 치고 있었는고 하니, 인류의 역사가 뻔히 그래왔듯 '오빠는 아빠가 되는 법'이고 '자식을 셋이나 낳아서'라는 변명을 해본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사실은 도시 순회 관광 명절이 살짝 재미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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