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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니애 Jan 22. 2024

다둥이 맘이 꼰대소리 좀 하겠습니다

-저출산 문제 해결의 다른 시각

 

 아이 넷쯤이야 거뜬히 키울 수 있을 줄 알았던 풋내기 시절이 있었다. 세상 물정이란 범 앞에 짖어보려던 하룻강아지 새댁, 겨우 둘을 낳고 이 강아지는 백기를 들었다. 저녁상을 물린 후 진지하게 남편을 불러다 앉혀놓고 잠시 눈을 맞춘 뒤 다짜고짜 서론 없는 감자를 던졌다. 

 “묶자.”

 하지만 종족 번식의 본능을 가진 강한 수컷인 이 남자는 쉬이 설득되지 않았다. 일단 생각을 해보자고 우물쭈물 망설이는 사이, 이미 다둥이네가 되어 있을 줄이야. 

 임신테스트기의 두 줄을 확인하는 순간, 눈물이 핑 돌며 자연스럽게 시야는 페이드아웃 되었고 정신은 아득히 다른 시공간으로 넘어갔다. 멀리 보낸 정신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일주일이 걸렸다.

 ‘그러니까 빨리 좀 묶자니깐!’     


 

 낳고 보니 이쁜 내 새끼란 말은 백번 옳은 말씀이지만, 예쁜 것이 먹여주지 않는 세상이다. 셋째를 갖고 든 가장 큰 근심은 출산의 공포도 아니요, 나의 건강도 아니요, 단절된 경력도 아니었다. 친지 없는 타지에서 도와주는 이 전혀 없이 사람 하나를 어른으로 오롯이 키워내기까지 드는 물질과 시간, 모든 기회비용이었다. 태교에 전념은커녕 외벌이 수입으로 식구들을 건사해 낼 계산기를 두들기는 현실이 배속의 태아에게 사뭇 미안했지만, 앞으로의 양육 환경 보장에 대한 책임감 없이 너를 덜컥 세상에 내놓을 순 없는 일이었다. 

 계산기를 두들기면서 알게 된 여러 보육 정책 중에서도 임신 바우처와 어린이집 보육료 지원은 가장 실질적인 도움이 된 혜택이었다. 일시적으로 지급되는 출산 축하금 100만 원과 아동 수당이 가정 경제에 의미가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당장 기저귀와 분유값이 걱정인 가정에는 필수 불가결의 지원금이긴 했어도 그때는 몰랐다. 진짜 레이스는 학교에 들어간 이후라는 것을. 


 나는 올해 삼 남매를 모두 같은 학교에 보내는 학령기 다둥이 맘이다. 출산과 육아의 애로 사항에 대해서 좀 떠들 수 있다는 말이다. 셋을 키우면서 수많은 아이 엄마들을 만나고 나서 더욱 확신하게 된 사실은, 부모들이 아이를 한 명만 낳고 더 이상 못 낳는 이유가 고작 기저귀와 분유값, 조리원 비용 때문이 아니란 것이다. 자녀를 키우면서 예기치 못한 어려움이 닥칠 때 적절히 도움받을 수 있는 인프라, 주거문제, 한 사람당 100만 원은 배당되어야 하는 사교육비(국영수에만 해당된다, 예체능을 시작한다면 가산이 거덜 난다)에 대한 부담감이 갓 허니문을 다녀온 신혼부부의 미래 계획을 옥죄여 온다. 

 0.78%의 출산율을 찍으며 인구절벽을 앞두고 위기에 서 있는 대한민국. 정부가 여러 정책을 내놓지만, 여성 경력 단절 문제와 사교육시장, 대입, 주거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배배 꼬인 고리를 풀기란 어려울 것이다. 여기에 대해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 싸매고 있으니, 정반합의 과정을 통해 어떻게든 해결 방법을 찾아가리라 기대한다. 그렇기에 40대 전업주부인 평범한 다둥이 맘은 다른 얘기를 좀 써볼까 한다.     


 80년대 경제성장과 더불어 기술과 문명이 꽃피우는 혜택을 누리며 살아온 요즘 시대의 학부모들은 성공을 욕망한다. 학벌과 경제 수준이 지나치게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내 자녀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최고점으로 발달한 문명을 누리는 인간으로 살게 해주고 싶다. 문 이과 예체능 통합형 인간으로 키우고 싶네, 그 와중에 인성도 훌륭하고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사는 사회 구성원으로 자랐으면 좋겠네 말하지만, 은밀한 속내에 ‘그러니까 무엇이든 두루 재능을 갖추는 건 디폴트요, 자기 분야에서 인정도 받는 매력적인 사람으로 성공해야지’가 깔려 있지 않다고 솔직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각종 미디어와 SNS에서도 비추는 연예인과 인플루언서들이 보여주는 삶이 욕망을 부추기는 반면, 몇몇 프로그램에서는 대한민국에서 결혼을 하고 자녀를 키우는 것이 유난스럽고 어려운 것으로 비추어지기도 한다.

 정답은 없다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면 된다고 다양성을 존중하자는 사회이지만 비혼주의, 딩크족을 선언하는 당위에 현실적인 문제만 존재하는지, 사라지고 있는 대한민국 공동체 운명에서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로 변호할 수 있는 개인주의인지 한 번으로 결론내지 말고 지속적인 질문을 던져보았으면 한다.

 욕망의 레이스에 전 국민이 동참한듯한 인구절벽 위기의 나라. 저출산의 문제를 딛고 국가의 존속을 꾀하려면 이러한 어려운 질문들, ‘철학’에 대한 교육을 시작해봄이 필요하다. 


 첫째, 물질 만능주의에서 벗어나는 인생철학이 필요하다.  

 파이어족, 욜로족, 금융치료 등의 단어들이 낯설지 않게 사용된다. 결국엔 돈이 모든 난제들을 해결하고 돈이 선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하다. 재물에 대한 복을 기원해주는 것이 건강을 빌어주는 것보다 못내 흐뭇하다. 

 재화가 가져다주는 인생의 기회를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 허접한 글솜씨를 가지고도 상금의 욕망에 혹하여 여기저기 공모전에 기웃거리는 중이다. 

 하지만 금전을 도구로 쓸 것인지 목적으로 삼을 것인지의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인생의 가치가 물질에 유한한 것이 아니다 말하면서 결국엔 재물에 대한 욕망의 원점으로 돌아온다면 국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고 있으면서도 함께 지고 가야 할 다음 세대 배출의 짐을 외면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 아닌지.

 이미 자녀를 기르고 있는 부모라면 다시 인생관을 살펴보자. 아무리 입으로 도덕과 윤리를 가르친들 매일 남들과 생활 형편을 비교하고 있고, 인 서울 대학을 위해 교육의 채찍질을 휘두르고, 돈의 가치를 분별하기 어려운 나이임에도 분수에 맞지 않은 의복이나 장난감을 갖추어 주며 만족을 느끼는 부모에게서 자녀가 삶으로 배우는 것은 물질 만능주의일 수밖에 없다. 이율배반적 삶의 태도를 벗겨내야 한다.      


둘째, 결혼과 출산에 대한 긍정적인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갈 미디어 철학이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낳았을 뿐인데 잠재적인 맘충이 되어버린 느낌에 허탈했던 적이 있다. 실제 무개념의 양육방식이 논란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모든 엄마들이 그런 것은 아닌데 갈라 치기를 즐기는 이들에게는 일반화될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TV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금쪽이들의 행동을 추적하면 결국 부모에게서 문제가 다 발견된다.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하며 생기는 갈등이 부부의 갈등으로 번지기도 한다. 결혼을 하는 것이 지옥처럼 표현하기도 하며 결혼을 지향하며 출연한 솔로들의 캐릭터는 하나같이 독특하다.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나도 갈등을 무수히 겪으며 결혼생활에 생존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았다 하여 갈등이 없고 고난이 없을까.  

 시청률을 위해 자극적인 소재를 찾게 되는 것은 이해하지만 이익을 좇는 과정에서 가정을 이루는 환상은 처참히 깨지고 말았다. 방송사에서 나 혼자 잘 사는 모습이 의롭고 편안하며 가정을 이루는 책임은 무겁고 유난한 것으로 자꾸 비추고 있는데 결혼의 장밋빛 꿈을 꾸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될까. 미디어는 현재의 시청률만 추구할 것인지, 후대의 시청률은 포기할 것인지, 심각한 비혼율과 저출산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는지 자문해보았으면 한다. 건전하면서도 환호받는 교양 예능이 진짜 능력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아닌지.     


 셋째, 부모 됨의 인생철학을 배워야 한다.

 키워주신 부모님을 떠나 독립하여 새 가정을 이루고 내가 부모가 되는 과정. 국가의 기본 단위인 가족 공동체는 사랑하는 연인이 고급스러운 홀에서 예쁜 꽃들에 둘러싸여 반짝이는 혼례복을 입고 허니문을 떠나는 것으로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하고 끝나는 해피엔딩 동화가 아니다. 때로는 행복했다가 때로는 숨이 막혔다가 희로애락이 존재하는데, 모든 장애를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희망했던 ‘희애’로 ‘노락’이 다 덮어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3~40년간 ‘나’로만 살아온 개인이 ‘서로’가 되어 가치관을 조율하며 사는 것만으로도 넘어가기 어려운 계단인데 자녀가 둘셋씩 생겨 인생을 가르쳐야 하는 어른이 되는 것은 에베레스트를 넘는 것과 같다. 타인과 연대할 줄도 알고 제 몫을 해내기도 하는 사회인으로 성장시키는 것이 부모의 몫인데 어른은커녕 유년시절의 교육조차 어려워진 ‘요즘’인 걸 인정한다. 먹이고 입히고만 해결되면 능사이던 80년대까지와는 부모의 포지션이 완전히 달라졌음이 확실하다.

 국영수는 열심히 배웠지만 남편으로 아내로 사는 법, 부모로 사는 법은 정해진 수업 시간이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 배우란 것인가. 

 사실 배우지 않은 것은 아니다. 도덕 시간에, 사회 시간에, 역사에서 윤리에서 스스로 인생의 가치관을 세우도록 가르쳤다. 다만 국영수가 아니라 적당히 점수만 유지할 과목이었지 깊이 고찰할 기회를 주지 않도록 입시제도가 조장한 것뿐이다. 

 그래서 다시 배우자. 결혼을 하기로 부모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나 이런 거 없어도 애들이 알아서 잘 크겠지.”, “다 그러면서 자라는 거야.” 하며 회피하지 말고 부모교육 강의와 서적을 열심히 찾아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도대체 키우기 어렵다는 요즘 아이들인데 나는 어떤 부모가 될 것인가, 자녀들에게 어떤 가치관을 심어줄 것인가를 정립하기 위해서라도 부모교육서 뿐만 아니라 경제와 문화, 역사와 정치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는 노력이 부단히 필요하다고 여긴다. 

 국가도 정책적으로 부모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와 기관을 늘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부모 교육도 공교육 수준의 보편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는다.     



 논제를 뒷받침할 근거는 보편타당한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쓰고 보니 꼰대스러워서 요즘 세대 젊은이들에게선 비판의 손가락질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연한 이유인 것 같아도 ‘왜?’를 묻는 집요한 물음과 생각들이 화려함을 꿈꾸는 욕망의 시대에서 저출산을 야기하는 진짜 본질을 무수히 끄집어 올려줄 것이라 생각한다. 

 더불어 문제를 탈피하려 시작한 철학의 시작이 학벌 위주 채용, 대인관계, 특정직업 쏠림 현상과 각 계층마다 용납하지 못하고 갈라치는 사회문제까지 아울러 해결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번듯한 삶에 로망이 있으면서도 출산은 걸림돌 같은 아이러니한 작금. 너도나도 성공을 종착지로 달려가는 레이스에서 성공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한번 깊게 고찰해 보는 것이 어떠냐고 국민들에게 청하고 싶다. 

 물가는 날로 치솟고 피곤한 삶이지만 그럴수록 어려운 질문을 하나씩 던지며 살아가자. 이 삶에 물질을 욕망하는 방법밖에 없느냐고 따져 물어가며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가족이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날로 늘어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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