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쓰니애 Jan 18. 2024

금쪽같은 네 새끼

 막둥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한 원아가 퇴소를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동네 엄마 통신에 의하면 어린이집 측의 특별한 과실이 없었으나 ‘특별한 우리 아이’에 대한 대접이 소홀했다는 이유가 원인이었다는 뒷담이다.

 "젊음을 바쳐 어렵게 임신해서 얻은 귀한 아이라고요."

 손이 귀한 집안의 독자를 낳은 거라며 부모는 위와 같이 주장했다지.


 어린이집 병아리들에게도 사회생활은 존재한다.

 타인에 대한 평가를 한 문장으로 매끄럽게 표현하기 어려워도 눈짓 손짓 발짓을 동원하여 이루어지는 비언어적 대화를 통해, '아이들끼리는 다 안다'. 누가 내 말을 잘 귀담아 들어주는지, 누가 자기중심적이고 막무가내인지. 이 꼬맹이들의 눈치코치는 만렙이어서 나와 놀이를 함께 할 수 있는 짝을 찾고 무리를 이루는 것이 봄햇살에 마른 가지 움트고 가을볕에 잎사귀 붉힘같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집에서 소황제 대접을 받던 아이는 어린이집에서도 자신이 늘 첫 번째이고 배려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여러 방편으로 표출했지만 같은 반 친구들에겐 그 귀한 아이가 그저 불편했다. 무리에 섞이지 못했고 서로를 배타했다. 아직 포용력을 기대하기 어려운 4살 5살일 꼬맹이일 뿐인데 함께 놀아주지 않아서 상처받았다 했고, 담임 선생님이 우리 귀한 아이를 외롭게 만들었다는 다소 씁쓸한 비난을 남기며 원아는 퇴소했다.


 우리 귀한 아이라는 말을 듣는데 초등학교 시절, 잊고 지내던 한 친구가 기억에서 마침 떠올랐다. 전교에서 이름 석 자 모르는 아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치맛바람의 부모를 둔 여자애가 있었는데 부모님께로부터 훈육의 회초리 한 번 맞은 적이 없다 했다(90년대 그 당시로서는 굉장히 드문 케이스다). 공들인 화장과 세련되게 입은 옷차림으로 교장실을 쉽게 오가던 그 애의 엄마는 딸애가 전화 한 통화만 하면 학교로 언제든지 달려와서 선생님을 대면했다.

 잠시 그 애와 함께 지냈던 5학년 때, 끊임없이 설득해 보았다. 힘들 때마다 엄마를 부르지 말고 우리끼리 해결해 보자, 친구들은 네 엄마가 학교에 계속 와서 선생님을 통해 입이 되는 상황을 불쾌해한다. 결국 다시 상황은 반복될 거다.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 알았다 했지만 결국 고쳐지진 않았다. 절교를 몇 번이나 했던지.

 특별히 싸우고 헤어진 것도 아니었는데 6학년이 되며 반이 달라지자 눈이 마주쳐도 냉랭하게 지나쳤다. 그 애에게 친구란 엄마가 매일 넉넉히 넣어주는 용돈만큼의 소모품이었다. 제법 부유했던 부모님이 매년 룸을 빌려 노래방까지 가는 화려한 생일파티를 열어주었고, 정기적인 선생님 접대와 학급에 돌리는 간식으로 많은 돈을 썼지만 결국 졸업 때까지 그 애 곁에 진정으로 남은 친구는 없었다. 중학교에 가서는 은근한 따돌림도 받았다고.


 저출산 시대에 아이 한 명이 귀하고 모든 자녀들은 자신이 속한 가정에서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임에 동의한다. 하지만 귀하게 존중받아야 하는 것은 생명 그 자체여야 하는 것, 인생의 일거수일투족 모든 행보는 아닐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그 여자애의 엄마가 딸을 애지중지하는 방법이 털끝하나 건드리지 않아서 고이고이 모시는 마음이 아니었더라면. 때론 친구관계에 상처도 받고 학교에서 실수를 하더라도 적절한 훈계로 이끌다가 적당히 물러서서 지켜봐 줌으로써 자녀가 스스로 성장할 기회를 주었더라면 그 애의 학창 시절이 조금 더 의미 있게 추억되지 않았을까.

 어린이집을 퇴소한 유아의 부모에게 오지랖을 부리고 싶다. 젊음을 바쳤던 거라면, 이왕 바치는 김에 시간 조금 더 바쳐서 부모 됨을 배우는 것이 어떻겠냐고. 자녀에게 물려주어야 할 진정한 유산은, 내 자식만 귀애함으로 극존 되는 것이 아니요,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함으로 인해 자신도 존중받을 수 있다는 인생의 지혜임을. 그리고 품 안의 자식으로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게 된다면 인생의 풍랑을 맞설 자아의 힘이 온전히 길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같은 어린이집에 자녀를 등원시키며 선생님들의 다정한 성품에 늘 감사해 마지않는 삼 남매 맘들이 모였다. 손이 귀한 집 독자여서 귀한 아이라는 말에 다둥이 맘들의 콧구멍에서 김이 쉭쉭 뿜어 나온다. 아이가 셋이면 그중에 하나는 덜 귀하고 물가에 내놓아도 괜찮은 자식이 되는가? 젊음을 바치다 못해 20년 대환란의 시기를 진행 중인 필자가 한 마디 하려 했으나, 3살, 6살 터울의 초 중 고 삼 남매를 키우는 대장 언니의 외침에 모두 합죽이가 되었다.


 “걔는 젊음을 바쳤어? 그럼 난 늙음을 바쳐 키웠다!”

매거진의 이전글 '결국 애 하나 더 낳은' 선녀의 노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