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쓰니애 Apr 15. 2024

그래, 나 전문대 나왔어쩔티비

 다감하고 점잖은 몸짓으로 마이크를 잡은 그녀는 우아한 음성을 이어갔다.

 "사실 전문대 출신이 어떠냐는  취지로 브런치 북을 이어가고 싶었거든요, 부끄럽지 않다, 전문대를 나와도 얼마든지 훌륭하게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걸 글로 쓰려고 했어요, 그런데 또 쓰다 보니 다른 이야기가 쓰고 싶더라고요, 내가 쓰려고 했던 의도랑 달라도 무엇이든 쓰고 있으면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토요일, 브런치에 함께 도전한 동기 작가님들과의 정모 자리였다. 출간 작가와 교수와 교사와 유학파와 서울 명문대 출신이 수두룩한 자리에서 전문대를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그녀의 모습이 실로 커 보였다. 잔잔하지만 힘주어 말하는 음성과 부드럽지만 확고한 눈빛에서 삶을 대하는 단단한 태도가 엿보였다. 학벌이 이 여인의 의지를 가로막지 못하리. 앞으로도 자신의 인생을 누구보다 전문적으로 꾸려갈 것으로 예상되는 그녀의 담담한 발표는 나에게로 물음표를 던져왔다.

 '너도 이제 커밍아웃할 때가 되지 않았니?"


그래, 나 전문대 출신이다.

 아, 후련하다. 역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인데 말이다.


 처음엔 4년 제로 시작했다. 국문학도로 2년을 살다 1년을 휴학했고 미국으로 떠났다. 큰 나라에서 새로운 세상을 접하고 인생의 로드맵을 다시 짜야겠다고 다짐했을 때 가장 매력 있었던 직업이 간호사였다. 허나, 국문학을 전공하던 뼛속깊이 문과생이 이과 수능을 다시 쳐서 간호학과로 들어가 또 4년 과정을 밟는다는 건, 시간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무엇보다도 공부역량으로나 어불성설이었다. 수 2를 새로 배워서 수능을 치라고? 차라리 지금 넷째를 낳는 게 더 쉽겠네(참고로 우리 집은 의느님의 도움으로 공장 폐업). 이미 3년을 까먹었는데 다시 수능을 준비하고 4년을 다니고 할 겨를이 없었다. 빠른 길을 알아보자, 효율적이고 현실 가능한. 미국에서 외삼촌의 후원으로 간호대를 다니려고 사실 서부의 어느 대학 입학시험도 쳤다. 입학 허가서도 나왔고 한국으로 돌아와 유학 비자만 받으면 끝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절차가 진행될수록 이미 이민 생활로 피로한 외갓집에 민폐거리만 하나 더 얹어드리는 듯한 형국이어서 차마 그곳에 더 있을 수가 없었다. 미국 유학길은 엎어졌으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전문대 간호과 입시 요강을 낱낱이 파헤쳤다. 전문대는 이전 대학 학점으로 원서를 넣을 수 있는 정원 외 전형으로 나를 받아주었다. 그렇게 국문과 중퇴생은 간호학도가 되었다.

 

 생리학과 병리학 첫 시간부터 문과생의 전두엽이 삐걱대기 시작했다. 이것은 이과 애들이 배우던 생물 2 과정이 아닌가. 공통과학도 가물가물한데 생물 2라니. 헌책방에서 고등학교 자습서를 구매하여 늦깎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학기 내내 독기를 품고 전공내용을 따라가겠다고 쓰니애는 애쓰고 있었다. 덕분에 얻은 별명, 기숙사의 꺼지지 않는 불.

 전문대에서 그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있냐고? 모르시는 말씀들이다. 전문대에서 3년 동안 배운 것은 비단 간호 전문 지식이 아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4년제 나와서 멀쩡한 직업을 갖고 있다가 간호사 직업에 동경을 가져서 온 사람들, 미국 이민을 목표로 간호사 면허가 필요한 사람들, 더 좋은 대학 갈 수 있지만 집안의 가장이 되어야 했던 사람들, 가정폭력으로 고통받았지만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장한 이들. 단지 4년제에 못 들어간 이들의 집합소라고 하기엔 그들의 삶은 치열했고 전문대에 오기 이전에 나의 시선은 옹색했다. 지잡대라는 단어를 쉽게 내뱉을 수 있는 온라인 악플러들의 시비를 가리기 앞서, 나도 색안경을 쓰고 개인의 잣대를 들이밀고 살아왔다.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보자. 탁한 안경을 쓰고 잣대를 휘두르며 탁탁 대고 있는 모습을. 장님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느 삐딱한 시선의 이들에겐 또 이것이 정신승리라 비칠지도 모른다. 각종 통계와 자신의 경험을 들먹이면서. 직접 다닌 당사자인데 그걸 모르겠나, 경계선 지적 장애가 있는 이들도 있고 열심히 청춘을 즐기는 이들도 있었다. 다만 말하고 싶은 건, 전문대생이라서 사람을 낮게 볼 구실과 핑계는 되지 않는다는 것. 함부로 누군가의 인생에 대해 잣대를 휘두르며 침 튀기는 건 무례하다는 것을.


 용감하고 당찬 동기 작가님 덕분에 장님 같던 나의 과거를 청산하고 전문대 안에서도 혼신의 노력으로 공부해야만 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in 서울 대학이든 지방대든 전문대이든, 자신이 속한 곳에서 만난 과업에 분투하며 얻은 결실이 부끄럽지 않다면, 그곳이 명문대가 아닐까. 

 명문대를 나오고 석사가 두 개인 남편은 글을 쓴답시고 컴퓨터 앞에 앉은 나를 가끔 놀린다. 국문과 중퇴생이라고. 웃기고 있네, 그래 놓고 연고도 혼자 못 바르는 주제에. 전문대 나온 아내가 아주 전문적으로 아프게 약을 발라줘야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