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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니애 Sep 10. 2024

부부 평화 협정엔 순대곱창이지

- 소울푸드 휘두르기 검법

 남편과 대화 없는 3일째 이어지고 있었다.

 사건의 시작은 아이들에게 한 번 좋은 엄마가 되어 보려는 다정한 야심에서 시작되었다. 


 때는 장마가 시작되기 전의 6월, 연일 폭염이 이어지고 있었고 아스팔트 길태양으로부터 받은 열을 마그마를 뿜듯 이글이글 토해내는 중이었다.


 아이고, 너네가 더운데 그늘도 없는 길을 무거운 책가방 메고 오가느라 힘들겠다. 너희도 공부한다고 네 나름 고생이 많지? 오늘은 엄마가 차로 데리러 갈 테니 모여서 학교 주차장으로 나와.

 아침에 미리 약속을 해두었고 가는 김에 서프라이즈로 간식도 준비해 가자. 귀여운 캐릭터 용기에 담아 파는 셰이크도 사고 처음 보는 과자도 준비하고 나니 뿌듯했다.

 나 좀 괜찮은 엄마지. 너희들도 인정하겠지?


 혼자만의 망상극이었다. 태평성세에 태어난 애들이란 대책 없이 순수해서 상황을 있는 그대로 즐길 뿐, 자신들이 누리는 일련의 혜택이 있기까지 준비된 엄마의 수고로움과 마음 따위는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아싸' 하는 정도의 사소한 이벤트일 뿐이었다. 이리저리 하여 엄마가 애를 썼으니 너희들은 응당 그에 마땅한 본분을 지키거라 종용하여도 우이독경이었다. 차라리 소가 경문을 읊는 것이 빨랐겠다. 자기 할 일은커녕, 핸드폰을 즐기는 데에 아주 시원하고 배부르고 신이 났다. 피시방에서 게임하는데 알아서 컵라면을 갖다 바친 격이랄까.


 이성과 감정의 조절중추가 팟 끊어지며 분노의 도화선이 점화되었다. 잘해보고자 하는 의욕이 앞서고 기대가 자라면 실망도 커지는 법이다. 딸아이에게 그토록 서운한 마음이 화로 변하여 언성이 높아졌고 물러서지 않는 10대의 정수리는 하늘을 향해 더 빳빳하게 치솟았다.

 밀크셰이크를 산다고 쓴 6900원이 쓰리게 아까웠다. 차로 데리러 가지 말고 집에서 시원하게 에어컨이나 시원하게 틀고 드라마나 볼 걸.  


 화염방사 중에 눈치 없는 전화벨이 울린다.

 남편이다.

 배가 고프단다.

 어쩌라고, 아직 퇴근시간도 아닌데 밥을 차릴 수도 없고 사줄 수도 없는데 뭘 원하는 걸까.


 여보 미안한데  지금 통화할 상황 아니야, 쟤 때문에 미치기 일보직전이야, 나는 정말 참다 참아서 폭발하는 건데 왜 당신은 맨날 나한테 짜증 내지 말라고 하는거야아아악!뚝.


 아차, 내가 방금 선을 넘은 것 같은데 어떡하지? 끊고 나서야 밀려오는 후회였다. 평소에 나더러 "너 요즘 짜증이 많이 늘은 것 같아."라고 말했던 남편의 말이 마침 떠올라 복받치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채 내지르고 말았다.

 말없이 전화를 끊은 남편은 그날 퇴근 후에 내 사과를 받지 않은 채 3일이 넘는 묵언수행을 이어갔고 사과를 했음에도 계속 동굴 속에 있는 남편에게 다시 화가 난 나도 묵음으로 받아쳤다.


 결혼생활 10년이 넘어가면 안다. 이러다가도 한 번 잘 드는 칼만 쥐어지면 물 베듯 넘어갈 일이라는 것을. 문제는 그 칼이 언제 어떻게 행운처럼 찾아오느냐는 것인데 이번에는 쉽지 않아 보이는 것이었다. 웬만하면 이틀째엔 말을 하는 사람인데 그의 침묵이 길었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타인과 같은 거리를 유지한 채 한 지붕 아래의 동거란 나 같은 극 외향인에겐 미칠 노릇이었다.

 그저 아내가 마침 이성을 잃은 타이밍에 전화를 받아 울부짖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저 이는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골똘히 고민해 보다 추측하게 되는 가설이 나왔다. 통화음량이 높게 설정되어 있었는데 하필 회사 사람들이 옆에서 듣고 민망해져 버린 건 아니었을까, 그래도 말단인턴 만년대리도 아닌 직급인데 내가 사람들 앞에서 남편의 체면을 깎아버린 건 아닐까 짐작하니 그의 묵언수행, 아니 시위가 이해되는 것이었다.


 좀 많이 미안하군. 사과를 먼저 건넸었지만 동굴 문 밖에서 반사한 남자에게 다시 한번 화해의 손을 내밀어 빛의 세상으로 살살 이끌고 나와야 함을 결심했다.

 첫 번째 필살기, 식탁으로 공략하기.

 퇴근 후 밥상을 차릴 때 장모의 마음으로 차린다. 주 메뉴는 그의 소울 푸드인 돼지 반 김치 반 김치찌개와 고기와 고기에 고기반찬.

 두 번째 필살기, 건강보조제와 영양 간식 챙기기.

 식사 후 아직 남은 입의 궁금함을 막힘없는 해답처럼 구비하여 그의 동굴 책상에 촤라락 대령하는 것.


 며칠간 이 노력을 했는데도 그는 예상보다 난공불락이었다. 흥, 쉽지 않은 상대인 줄은 알았지만 녀석, 꽤 센 걸? 그렇지만 이건 못 당하겠지.


 세 번째 필살기. 가련한 비운의 여주 기술.

 그렇다, 잘 드는 칼이 비로소 내게 찾아왔다. 2주 전 검사했던 건강검진 결과가 도착한 것! 말도 안 되게 빈혈지표 수치가 낮았다. 가련하고 나약한 여인을 못 본 체할 영웅이 어디 있으리. 식탁 위 잘 보이는 위치에 결과지를 올려놓고 관심을 끈 다음, 약간의 MSG를 첨가한 브리핑을 읊었다. 비굴하기는 또 싫어서 대화체가 아닌 보고체로 무심히 툭 던져냈다.

 "작년보다 헤모글로빈 수치가 더 떨어졌어. 병원 있었을 땐 수혈 2팩은 처방되는 수치인데 어쩐지 어지럽고 힘이 없다 했더니 심한 빈혈이었어, 철분섭취에 문제가 좀 있긴 있나 봐."

 말없이 가만히 듣던 남편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어떡해야 하는데?"

 예스! 드디어 넘어왔다, 그러면 그렇지 가녀린 여인에게 가오 잡아 뭐 할 거냐고.

 "뭐 철분제도 복용하고 육류 같은 철분이 많이 들은 음식 먹어봐야지, 안되면 주사라도 맞아야 하고."

 별 일 아니라는 듯 대답한 뒤 부엌일을 막 하고 아이들 뒤치다꺼리하다가 그의 시선이 닿는 위치에 서서 괜히 한 번 머리를 짚어본다. 그리고 한 번씩 식탁을 잡고 주저앉았다가 휴, 하며 눈동자를 한 바퀴 굴리고 다시 일어나 열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때, 내 여자 지켜주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지?


 다음 날, 퇴근하는 그의 손에 검은 봉지가 달려 있었다.

  "이게 뭐야?"

 "순대곱창 볶음."

 "갑자기 왜?"

 "너 빈혈이라며, 피 들은 거 먹으면 괜찮을 거 아니야."

  

 흠. 남자여, 보통은 육즙이 좔좔 흐르는 두툼한 소 쪽이지 않겠는지? 그렇지만 그가 굳이 순대볶음을 사 오는 데엔 결혼 전부터 달거리 때만 되면 이상하게 순대를 찾는 내 식이취향을 알기 때문이렸다.

 걱정 반 화해 반의 반, 그리고 애정 반의 반이 담긴 순대볶음 포장을 신나게 받아 들고 아직 표정 굳은 척하는 남편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며 종알거린다.

 "와이프 아플까 봐 걱정됐던 거야? 어떻게 내 입맛을 이렇게 잘 알지?"


 씰룩. 그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는 순간을 난 분명 목격했다.

 아싸 내가 이겼다.


 



 불행히도? 지난주에 순대볶음을 또 먹게 되었다. 빈혈과 상관없이 그냥 남편이 내민 화해의 손이었지만. 이거 참, 필살기 첫 번째 두 번째 할 것도 없이 소울푸드로 공략하는 남편에게 손쉽게 져버리는 쪽은 나였던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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