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소개팅 자리에서 좋아하는 음식을 묻나요? 라떼는 그런 질문을 하나씩 하고 그랬답니다. 단정하고 숫기 하나 없던 그 남자도 궁금해했죠.
"네? 떡볶이요?"
최애 음식을 듣고 그는 폭소하고 말았습니다. 떡볶이를 좋아한다는데 웃을 일인가요. 그가 더 웃긴 사람 아닌가요. 농담하지 말라며 진짜 좋아하는 음식을 말해 보라고 하더군요. 소개팅에 나온 여자라면 으레 파스타, 스테이크 그런 답을 내놓을 줄 알았나 봐요. 대충 꾸며낸 말이라 생각했으면 호감이 없는 걸로 알아먹든가 눈치 꽤나 없던 그 사람은 다음 약속을 잡아 버립니다.
두 번째 만남에 도착한 곳은 분식집도 스테이크 하우스도 아닌 서울 외곽의 통돼지 바비큐집. 지금 만났으면 이 사람 진국이네, 이탈리아 레스토랑보다 낫네 그러면서 고기 3인분을 쌈 싸먹고 쌍따봉과 별 다섯 개를 날려줬을 겁니다. 그란데 말입니다. 저는 새초롬한 뭘 잘 모르는 20대 스테인리스 미스였잖아요. 가뜩이나 끌리지 않았는데 없던 매력이 더 떨어져 버렸죠. 꼭 떡볶이가 아니라서는 아니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 더 물어봐 주지 않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데다 데이트 장소도 마음에 들지 않으니 점수를 주지 않을 수밖에요.
떡볶이를 가장 좋아하는 건 사실입니다. 삼시 세 끼로 먹을 수 있거든요. 동생이랑 자취할 때 주말마다 떡볶이만 계속해줬던 적도 있어요. 뭐 먹을래 하면 떡볶이가 가장 먼저 나오고, 떡볶이 먹자는 사람은 막지 않고 따라갑니다. 지금 다니는 회사를 십 년 넘게 다닐 수 있는 건 떡볶이 같이 먹으러 갈 친구가 있어서 일지도 모릅니다. 재택 근무하던 시절에는 떡볶이를 해 먹거나 배달하거나 내 앞에 새빨간 한 상을 차려놓고 즐기는 만찬에 행복했죠. 눈을 감으면 학창 시절 매점의 고추장 반, 설탕 반의 멀멀한 떡볶이, 교문 앞 참새 방앗간처럼 들르던 분식점의 찐득하고 매콤했던 떡볶이가 생생합니다.
하고 많은 음식 중에 왜 떡볶이가 맛있을까요? 맵싸하면서 칼칼하고 달짝 지근한 그 맛이 좋달까요. 누가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서 첫 맛은 달콤했는데 끝 맛은 매콤하기도 하고 얼큰한 맛으로 시작해서 달달하게 마무리되기도 합니다. 고추장, 고춧가루, 설탕, 간장의 하모니로 이 모든 맛을 다 냅니다. 오묘한 맛이 한데 모여 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식감도 고루 섞여 있습니다. 쫜득한 떡, 탄력 있게 씹히는 어묵, 꼬들한 라면, 쫀쫀하게 끊어 먹는 쫄면, 으깨서 소스랑 질펀하게 먹는 계란, 베어 물면 기름이랑 수분이 찍 나오는 바싹한 만두, 진득하게 쫙 늘어나서 떡을 촤락 감싸주는 치즈, 어떤 재료를 넣어도 떡볶이 소스와 잘 어울립니다.
냉장고 파먹기 할 때 이 보다 더 좋은 요리가 있을까요? 내가 좋아하는 식재료를 마음껏 우리고, 섞고, 얹힐 수 있는 게 떡볶이의 매력입니다. 해산물 떡볶이, 차돌 떡볶이, 마늘 떡볶이, 깻잎 떡볶이, 오징어 튀김 떡볶이처럼 곁들이는 음식에 따라 이름도 다양하고요. 국물을 맹물이냐 다시마, 멸치로 내느냐, 간 마늘이나 다시다로 내느냐에 따라 담담하거나 깊이 있게 시원하거나 맛이 갈립니다. 이것저것 마구 때려 넣어도 다 품어 주는 맛, 그것이 떡볶이의 품격입니다.
떡볶이를 같이 먹은 남자는 구 남친, 현 남편입니다. 연애할 때 레스토랑 스타일의 고급진 분식집이 유행이었요. 가로수길에 정원이 딸린 프리미엄 분식집은 분위기만큼 단가가 높았죠. 떡볶이 한 접시가 만원 가까이했거든요. 연애 초기였는데 모태 솔로에 가까웠던 구 남친은 메뉴판을 보고 '비싸네' 한 마디를 툭 해버립니다. 지금 같았으면 인간아 나한테 돈 쓰는 게 그렇게 아깝니, 내가 좋아하는 음식인데 그 정도도 못 사주냐며 면박을 줬을 텐데 마음만 꾸깃꾸깃해서 말을 못하고 식당을 나와서야 울음이 터져 버리고 맙니다. 남친은 이 일화로 평생토록 구박받을 줄 그때는 몰랐겠죠.
그렇게 서러웠으면 그만 만났으면 될 것을 어쩌다가 결혼까지 했을까요. 떡볶이를 먹어서였을까요. 알고 보니 그는 한 때 분식집 막내아들이었습니다. 엄마가 새벽부터 재료 준비해서 한 접시에 3천 원 받는 그 떡볶이를 3배나 주고 먹기가 쉽지 않았던 거죠. 연애할 때 진작 알려줬으면 눈물까지 안 보였을 텐데 으이구 인간아. 부부가 된 뒤에는 더 이상 그 남자와 떡볶이를 같이 먹지 않습니다. 남편은 전생이 어부인가 의심이 될 정도로 해산물파이기 때문에 떡볶이의 참맛을 모르 는 자와는 흥이 안 나서 분식파인 저는 혼자 먹거나 친구와 즐기게 되었습니다.
이쯤 되면 맛집 리스트가 안 나오나 궁금하시겠지요? 종종 찾는 곳은 있지만 사실 저는 제가 만든 떡볶이를 가장 좋아합니다. 밖에서 사 먹으면 겪어 보셨을 거예요. '매운 맛이 덜한데', '너무 단 거 아니야', '떡이 더 꾸덕해야 하는데', '어묵이 적네'처럼 2 프로 부족했던 경험을. 내 입맛에 100 퍼센트 맞춤으로 원하는 재료와 양념을 팍팍 넣고 후루룩 짭짭 속 편히, 맘 편히 먹는 건 역시 집에서 내가 만든 떡볶이더라고요. 어느 분식집을 가볼까, 어디에서 배달을 시킬까 매번 고민하지만 떡볶이만큼은 결국 내 손으로 해 먹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소개팅한 그 남자와 떡볶이 맛집에 갔다면, 조폭 떡볶이를 먹고 홍대 거리를 걸었다면, 신당동 마복림 할머니네를 찾았다면, 즉석 떡볶이 먹고 밥을 볶아서 하트 모양이라도 만들었다면, 떡튀순이 좋냐, 김떡순이 좋냐 논쟁이라도 했다면, 학교 앞 떡볶이집 추억이라도 공유했다면, 밀떡파인가 쌀떡파인가 취향이라도 물었다면, 꾸덕한 부산 떡볶이의 도장 깨기를 약속했다면 우리는 잘 되었을까요? 그때 물어보지 못했던 그 남자에게 떡볶이란 어떤 음식인지 궁금해지는 밤입니다. 와이프와 떡볶이 맛집을 다니는 다정한 아재가 되었는지, 하교하는 아이들을 기다렸다 학교 앞 분식집에서 떡볶이 사 주는 좋은 아버지가 됐는지 모르겠네요. 슬픔과 울분이 가득한 날에는 매콤한 떡볶이에 눈물을 겹치고, 소소한 행복이 가득한 날에는 달콤한 떡볶이와 까르륵 웃음이 함께 하기를 빌어 봅니다.